- 스티브 맥베이 박사 – 은 혜 의 영 성 (서울세미나)

- 스티브 맥베이 박사 – 은 혜 의 영 성 (서울세미나)



차 례

- 은혜의 영성 세미나 –


1 과, 비참한 그리스도인들 ㆍㆍㆍㆍㆍㆍㆍㆍㆍㆍㆍㆍㆍㆍㆍㆍ 2

2 과, 새벽을 바라보는 어둠 ㆍㆍㆍㆍㆍㆍㆍㆍㆍㆍㆍㆍㆍㆍㆍ 13

3 과, 아주 새로워진 나 ㆍㆍㆍㆍㆍㆍㆍㆍㆍㆍㆍㆍㆍㆍㆍㆍㆍ 27

4 과, 옛 사람의 죽음 ㆍㆍㆍㆍㆍㆍㆍㆍㆍㆍㆍㆍㆍㆍㆍㆍㆍㆍ 40

5 과, 율법에서의 자유 ㆍㆍㆍㆍㆍㆍㆍㆍㆍㆍㆍㆍㆍㆍㆍㆍㆍㆍ 54

6 과, 승리는 은사입니다 ㆍㆍㆍㆍㆍㆍㆍㆍㆍㆍㆍㆍㆍㆍㆍㆍㆍ 74

7 과, 예수님의 생명을 경험하라 ㆍㆍㆍㆍㆍㆍㆍㆍㆍㆍㆍㆍㆍㆍ86

8 과, 은혜의 영성 ㆍㆍㆍㆍㆍㆍㆍㆍㆍㆍㆍㆍㆍㆍㆍㆍㆍㆍㆍㆍ100




제 1 과 비참한 그리스도인들

오늘 제가 여기 선 것은 단 한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저는 제 삶의 변화를 경험하였습니다. 간단한 메시지에 의해서 삶이 변했습니다. 그러나 그 간단한 메시지가 얼마나 새롭게 들렸는지 모릅니다. 제가 회심하고 난 이후 29년만에, 목사가 된지 17년이 된 이후에, 그러니까 지금부터 10년 전 주님께서는 제게 새로운 것을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내 삶을 완전히 변화시킨 가르침이었습니다. 주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의 내 신분을 완전히 바꾸어 버렸습니다. 은혜 아래서 걸어가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주님은 도덕주의라는 암 병에서 나를 건져주셨습니다. 그리고 전세계의 많은 사람들과 이 메시지를 나눌 때에, 그 사람들에게서도 동일하게 변화를 일으키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발견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나에게 있었던 변화입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어떤 전문가로 선 것이 아닙니다. 저는 믿음 안에서 여러분과 한 형제로서 여기에 서 있습니다. 바로 주님께서 나에게 주신 메시지 때문입니다. 저의 기도는 아주 겸손하게 이 메시지를 여러분과 함께 나누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메시지에 복을 주실 것이라는 확신으로 나왔습니다. 이 메시지가 여러분의 심령 속에서 생기를 가지고 활동하기를 기원합니다. 그리고 나와 똑같은 변화가 여러분에게도 있기를 원합니다.
저는 수년동안 제가 깰 수 없는 패턴 속에서 살았습니다. 저는 하나님 앞에 동기를 얻어 일하다가 실망하고 다시 헌신하고 , 다시 동기를 얻고 재 헌신하는 다시 실망하는 사이클 속에 살았습니다. 저는 어떤 동기를 가지고 주님 앞에 무엇인가를 하려고 하였을 때마다 주님께 충분히 헌신하지 못했습니다. 나는 아주 바쁘고 활동적이었고 열정적이었습니다. 복음 증거를 위하여 바빴습니다. 언젠가는 하루 105가정의 문들을 두두렸습니다. 이런 많은 가정들을 방문하였을 때, 나는 더욱 더 거룩해 질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내가 그렇게 하였을 때 주님께서 나를 더욱 받아들여 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어느 주일날 저는 제 사무실에 갔습니다. 그리고 그 사무실을 수요일까지 떠나지 않았습니다. 거기서 금식하고 기도하며 있었습니다. 나는 그렇게 주님을 섬길 때에 주님께서 복을 주실 것이라고 믿었는데, 이런 행위가 주님을 영화롭게 한다고 믿었습니다. 이 동기의 수준에서 저는 열정적이었으며 저는 이 동기의 수준에서만 머물러 있을 수 없었습니다. 저는 활동을 계속하였는데 시간이 감으로 점점 더 침체되는 것이었습니다. 전과 비교해서 수준이 점점 더 떨어지고 있었습니다. 믿음의 두 번째 사이클에 와 있었던 것입니다. 즉 나를 자책하는 단계로 떨어진 것입니다. 저는 스스로를 책망했습니다. 왜 나는 좀더 지속적이지 못할까? 나는 왜 믿음의 상태가 오르락내리락할까? 이런 단계 이후에 주님 앞에 기도합니다. 주님 이런 나를 용서하여 주옵소서. 이것이 나를 재 헌신의 단계로 이끌어 갔습니다. 주님 앞에 약속하며 더 잘하겠다고 마음먹습니다. 성경을 더 많이 읽겠습니다. 기도하고 전도하고 나누며 섬기며 더욱 헌신 하겠습니다 라고 하면서 다시 동기의 사이클로 들어갑니다. 동기, 책망, 재 헌신의 사이클이었습니다. 항상 이렇게 반복됩니다. 내가 어떻게 여기서 자유할 수 있을까? 지속적인 권능을 가질 수 있으며, 어떻게 지속적인 승리를 가질 수 있을까?
1990년 주님께서 나에게 한가지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바로 여기에 길이 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나의 신분을 발견하면서부터입니다. 29년 동안 저는 율법주의 적으로 살았습니다. 저의 심장은 주님을 위해 뛰고 있었습니다. 저는 참으로 신실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나의 심장과 나의 신실함으로는 안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바로 내 머리의 문제였습니다. 이것은 나의 깨달음의 문제였습니다. 율법주의란 우리가 만든 시스템인데 삶을 발전시키려는 도구입니다. 우리가 무엇인가 하는 일에 근거해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아보려고 하는 시스템입니다. 다른 시스템이 있는데 바로 은혜의 시스템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우리의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복 주십니다. 오직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다른 이유는 없습니다.
이 시간에 율법과 은혜에 관하여 살펴보겠습니다.

1. 육신의 삶과 은혜의 삶
우리는 두 가지 중에 한가지를 선택할 수 있습니다. 육신의 삶을 선택하는 것, 그것은 바로 율법적인 삶입니다. 또 다른 하나는 성령 안에서 걷는 삶인데, 이것이 은혜의 삶입니다. 저는 오랜동안 육으로 살았습니다. 저는 이것을 원하지 안았지만, 제가 육적인 삶을 살고 있는지 조차 이해하지 못했고 그렇게 살고 있었습니다. 육신의 삶과 믿음의 삶을 비교해 봅시다.

1) 육신의 삶은 하나님을 위하여 살려고 자기 자신을 바치는데 몰두합니다.
육신이라는 것은 흉하게 보이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이 이야기하는 육은 바로 내 스스로 만족하는 삶을 말합니다. 내 능력을 가지고 내 스스로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내가 내 삶을 조정하는 것입니다. 육은 내 능력으로 일을 처리해 나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내가 스스로 하나님을 위해 살아보려는 노력입니다. 이것은 믿는 것이 아니라 시도하는 것입니다.
어렸을 때 목사님들이 육에 대하여 설교하는 것을 많이 들었습니다. 주일날 예배를 드릴 때면 어떤 사람들은 토요일 저녁에 술을 많이 먹어서 눈이 충혈된 사람들이 있습니다. 저는 그것이 육적인 삶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육적인 삶은 자기 아내를 속이고 딴 살림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자기 회사의 돈을 횡령하는 사람을 육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모든 것들이 육적으로 보였습니다. 그러나 육적인 삶은 이런 삶에만 국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육적인 삶을 드려다 보면 이것은 아주 좋아 보일 수도 있습니다. 빌립보서 3:4에서 사도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나도 육체를 신뢰할 만하니 만일 누구든지 다른 이가 육체를 신뢰할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리니 내가 팔 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의 족속이요 베냐민의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빌립보서3:4)

바울은 ‘육적인 삶을 보고 싶으십니까? 그렇다면 내 삶을 보십시요’라고 말합니다. ‘어떤 사람이 자기의 육에 대하여 자랑한다면 나는 더욱 그러하다’하고 말합니다. 그리고 바울은 자기가 할 수 있는 능력에 대하여 말합니다. 이것이 바로 사도 바울이 내놓을 수 있는 이력서입니다. 자기의 이력서를 내놓았을 때 모든 사람들이 놀랐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을 배설물과 같이 여긴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바로 내가 갖고 있는 종교적인 육이라고 합니다. 사도 바울은 매우 신실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자기의 능력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바로 이런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살려는 신실한 마음이 있습니다. 우리의 놀라운 능력을 가지고 내가 살아보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육적인 걸음입니다. 그러나 은혜의 삶은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서 사시는 것인데 육적인 것과는 완전히 반대가 됩니다.

2)은혜의 삶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통해 사시도록 맡기는 삶입니다.
은혜의 걸음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 마음속에 오셔서 우리를 통해 살게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율법 아래 있을 때에는 무엇인가를 행해야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한 법칙에 시선이 머물러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포커스는 예수에게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두 눈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고정되어 있어야 합니다. 율법은 무엇을 하는가에 강조점을 둡니다. 그러나 은혜의 걸음은 예수 그리스도가 무엇을 하였는가에 강조점을 둡니다. 은혜의 걸음은 예수그리스도의 삶이 우리의 삶에서 어떻게 표현되는가 입니다.

2. 율법과 은혜의 체계
율법이 한 쪽에 있고 은혜가 다른 한 쪽에 있습니다. 이쪽에 믿음이 있고 저쪽에는 율법이 서로 반대되는 쪽에 있습니다. 율법과 은혜가 어디에서 시작되는 것입니까? 은혜와 율법이 갖고 있는 근본을 봅시다. 이 둘은 서로 반대되는 입장에 있습니다. 이것의 근원이 에덴의 동산까지 갑니다.

1) 창세기 2장 8-9절을 보면 에덴동산에는 두 나무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창세기2:8-9)

바로 이 나무들이 두 가지의 시스템을 이야기합니다. 이 둘은 서로 반대되는 입장을 가지고 있습니다. 구약은 신약을 통하여 이해할 수 있습니다. 생명의 나무는 무엇입니까? 신약에서 생명에 대한 이야기는 모두가 예수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① 생명의 나무는 예수의 그림입니다.
하나님이 에덴을 만드시면서 사람은 생명의 나무를 인하여 살 것은 설계하셨습니다. 아담과 이브는 생명의 나무를 먹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영원히 살도록 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인류에게 향한 처음의 계획이었습니다. 인간의 매일의 삶이 하나님과 교통을 하면서 살도록 하는 것이 그 계획입니다. 그것이 바로 요한복음15:4-5절의 내용입니다.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한복음15:4-5)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은 그 나무가 예수님이라는 것입니다. 너희는 내 안에 거하여야 한다는 말합니다. 만약에 내 안에 거하고 내가 여러분 안에 거하면 많은 열매를 맺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창조하시면서 두신 첫 번째 목적이었습니다. 창조부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삶을 디자인하였습니다. 우리가 예수 안에 거할 때에 그분은 우리의 삶을 통하여 열매를 거두십니다.
그러나 율법주의가 이야기하는 것은 여러분이 스스로 열매를 맺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은혜의 걸음은 내가 아닌 내 안의 예수가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저의 이야기가 맞는 이야기인지 판단해 보십시오.

(저는 미국의 남부에서 자라났습니다. 거기는 아주 복숭아들이 많이 납니다. 저는 과수원에서 놀았습니다. 그곳은 아주 고요했습니다. 무슨 소리를 들었는데 끙끙대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무슨 소리일까? 거기에 복숭아 하나가 흔들리면서 복숭아가 떨어졌습니다. 복숭아가 더 많이 자라려고 더 많은 열매를 맺으려고 끙끙거리고 힘을 쓰는 것입니다. 큰 소리를 내면서 힘쓰자 열매가 더 많이 맺혔습니다.)
이것이 맞는 이야기입니까? 성경의 이야기는 이것이 우리가 살아가는 방법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에게 합류가 되었을 때, 그 안에 거할 때, 그 분이 우리를 통하여 열매를 맺어 가십니다. 생명의 나무는 예수를 가르칩니다.

②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율법을 보여줍니다.
그 안에는 다른 나무가 있습니다. 선악과입니다. 이 나무는 지식의 나무입니다. 선악을 가려냅니다. 선과 악은 도덕을 규범하는 것입니다. 이 나무는 율법입니다. 하나님은 이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고 명령하신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창세기2:16-17)

하나님께서 이 나무에 대하여 이 나무의 열매는 절대로 먹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의도는 먹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도는 생명의 나무를 먹는 것입니다. 그 이후에 사탄이 옵니다.

2) 사탄은 첫 번째 거짓말을 합니다. 뱀은 너희가 하나님처럼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뱀의 이야기에는 처음부터 문제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하나님이 가라사대 내가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 식물이 되리라 또 땅의 모든 짐승과 공중의 모든 새와 생명이 있어 땅에 기는 모든 것에게는 내가 모든 푸른 풀을 식물로 주노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하나님이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창1:26-31)

뱀이 나의 말대로 하면 하나님처럼 될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현실은 이미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과 같이 되어있습니다. 성경의 이야기는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미 창조된 것을 보시고 심히 좋았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뱀은 너희가 이것을 먹어야 하나님 처럼 될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과 같은데 하나님 처럼 될 것이라고 거짓말을 합니다. 너희가 무엇인가를 더 열심히 하면 하나님처럼 될 것이라는 말이 거짓말이었습니다.
제가 이렇게 설교했습니다.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를 닮은 삶을 살고 싶으십니까? 만약에 그렇게 되고 싶다면 제가 말하는 것을 행하십시오”라고 했습니다. 저는 믿는 자들은 이미 예수님의 형상을 닮아 있다는 것을 모르고 이렇게 해야 닮을 수 있다고 설교를 해왔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이미 그의 형상을 본받았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설교했습니다. 예수를 닮기 위해서는 이렇게 행하여야 한다고 했습니다. 제가 사탄의 일을 해왔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뱀은 한가지만 하라고 했지만 저는 교인들에게 얼마나 많은 것을 하라고 요구했는지 모릅니다.
이번 만남을 통하여 이러한 진리에 대하여 알아가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필요는 좀더 거룩해 지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이미 갖고 있는 거룩함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이미 주신 신분대로 사는 것입니다. 아담과 이브는 스스로가 누구였는지를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미 이루어 놓은 일을 스스로 이루어 보려고 했습니다. 현대의 기독교인들도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일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지 못하고 율법주의 아래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3)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은 이후 여러 가지 결과들이 발생하였습니다.
첫째는 하나님과는 동떨어진 정체성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선악과를 먹기 이전에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 안에서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더 이상 하나님과 사람의 문제가 아니었고, 하나님과 그들은 하나였습니다. 선악과를 따먹을 때 그들은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게 되었습니다. 그 이후 하나님은 높이 계셨고 사람들은 타락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 안에 있던 자기의 신분을 그 때 잊어버리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자기의 신분을 찾기 위하여 여러 가지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두번쨰는 사람들은 하나님보다 자기를 더 의식하게 되었습니다. 성경에는 아담과 하와는 그들의 눈이 밝아졌습니다. 그 이후 무엇을 보았습니까? 스스로 벌거벗은 것을 보게되었습니다. 그 이전에도 그들은 아무것도 입고 있지 않았습니다. 아무것도 입지 않고 살아왔지만 서로 벗은 것에 대하여 인식하지 못하고 살아왔습니다. 선악과를 따먹은 순간에 벌거벗은 것을 인식한 것입니다. 왜 전에는 벌거벗은 것을 인식하지 못했을까요? 왜냐하면 그들 스스로를 바라볼 필요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먹기 전 까지는 모든 것이 하나님께 집중되었기 때문에 자신들을 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율법의 나무의 열매를 먹고 하나님에게서 시선을 돌렸을 때에 스스로를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율법주의가 가지고 있는 특징이 이것입니다. 그들 스스로는 계속 자신을 처다봅니다. 아담과 이브가 자신을 바라볼 때 하나님 앞에 받아들여지지 못할 것을 보게 됩니다. 자신들의 부족함에 대하여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기대하는 수준까지 도달하지 못하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스스로 노력하여 그들이 받아들여지기를 원했습니다. 그들이 잎사귀로 가리웠지요, 그렇게 함으로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있으리라 생각했습니다. 율법주의 아래서 사는 사람들은 자신이 결코 하나님 앞에 받아들여질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바라보고만 있지 스스로 도달하지 못할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노력과 행위를 통하여 무엇을 해보려고 하는 것이 율법주의입니다. 자기의 잘못된 습관을 고쳐보려고 하는 방법으로 나가려고 합니다.

세 번째는 사람들은 가치의 세계에 의하여 살아가게 됩니다. 이런 사람들의 가치는 어떻게 하면 좋은 일을 하고 어떻게 하면 나쁜 일을 피할 것인가에 국한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질문을 하겠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지 않았을 때 그들은 선악을 구별할 수 있었을까요 없었을까요? 구별할 수 없었습니다. 선이 무엇인지 악이 무엇인지 몰랐습니다. 그들이 선악과를 먹었을 때 선악을 구별하게 되었습니다. 다른 하나의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그들이 선악과를 따먹을 때에 선과 악이 같이 공존해 있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은 선도 악도 행하지 않았습니다. 선한 것과 악한 것은 도덕이 정해준 규범입니다. 그 이전에는 도덕이라는 것이 없었습니다. 도덕보다 더 가치 있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들은 기적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직접 오는 삶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도덕주의 안에서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가려내는 것 보다 더 가치 있는 삶이었습니다. 구원받지 못하고도 선과 악을 구별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도덕적인 것보다 더 가치 있는 삶을 위하여 부르셨습니다. 바로 우리가 기적적인 삶을 살기를 원하셨습니다. 기독교인은 선한 일을 하는 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우리는 세상 안에서 의롭게 살아야 합니다. 율법주의 아래에 있는 사람들은 자신의 행위에 강조점이 있습니다. 이들은 끊임없이 질문을 합니다. 이것이 옳은 일인가 나쁜 일인가? 그러나 은혜 아래 있는 자들은 늘 예수님에게 집중되어 있기 때문에 그들의 행동은 이미 경건한 것이 되어 있습니다. 규칙 때문에 경건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 때문에 경건해 지는 것입니다.

네 번째 결과는 사람들은 자신의 행위를 인정받기 위해 노력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율법주의는 자기의 행위에 퍼포먼스가 있습니다. 저는 행위가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는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경건한 행위는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 속에서 넘쳐 흘러나는 것이지 내가 스스로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육신의 삶의 핵심은 행위 중심의 삶입니다. 저는 전에는 행하라, 행하라고 설교했습니다. 예수에 대하여 설교하지 않고 성도의 행위에 대하여 설교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 사랑의 관계를 갖고 있으면 그분을 위해 살려는 마음이 자연히 일어나게 됩니다. 저는 율법주의에 사로잡힌 목사였습니다. 율법만을 강조하였습니다. “여러분의 눈과 손과 발이 하나님의 소원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들을 필요로 한다”고 설교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4) 육신의 삶의 핵심은 행위 중심의 삶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필요로 하신 것이 아니였습니다. 내가 태어나기 전에도 하나님은 잘하셨습니다. 내가 태어난 이후에도 여전히 하나님의 일은 이루어 집니다. 내가 없어도 됩니다. 우리의 섬김을 꼭 필요로 하시지 않습니다. 그것보다 더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원하십니다. 우리 자신을 원하십니다. 여러분을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을 원하고 있습니다. 필요로 하는 것과 원한다는 것은 아주 큰 차이가 있습니다. 성경을 보십시다.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자이심이라(사도행전17:25)

하나님께서 무엇이 필요한 것처럼 사람의 섬김을 필요로 하시는 분은 아닙니다. 은혜 아래서 걷고 쉬는 것을 배우기 전에는 신앙생활에서 평안함을 절대로 누리지 못할 것입니다. 그리스도 아래서 쉬는 것을 배우지 못하면 율법주의에 끌려 다니게 될 것입니다. 육적인 삶을 살 수 밖에 없습니다. 에수님과의 친밀한 관계를 즐길 수 없습니다.

육신의 삶은 세가지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 육신의 삶은 명성에 의하여 움직입니다: 다른 사람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 육신의 삶은 성취욕에 의하여 움직입니다: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 육신의 삶은 자기에게 좋은 이미지를 만들어 내기 위하여 움직입니다; 내가 스스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 이것이 바로 육적인 삶의 모습입니다. 선악과를 먹은 이후에 이런 것들이 왔습니다.
창세기 4장에는 두 가정이 나옵니다. 가인과 셋의 가정입니다. 두 가정 중에 한 가정이 하나님을 의지해서 살았는데 한 가정은 의지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독단적으로 산 가정이 가인입니다. 창세기 4장 16-22절을 보겠습니다.

가인이 여호와의 앞을 떠나 나가 에덴 동편 놋 땅에 거하였더니 아내와 동침하니 그가 잉태하여 에녹을 낳은지라 가인이 성을 쌓고 그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이름하여 에녹이라 하였더라 에녹이 이랏을 낳았고 이랏은 므후야엘을 낳았고 므후야엘은 므드사엘을 낳았고 므드사엘은 라멕을 낳았더라 라멕이 두 아내를 취하였으니 하나의 이름은 아다요 하나의 이름은 씰라며 아다는 야발을 낳았으니 그는 장막에 거하여 육축 치는 자의 조상이 되었고 그 아우의 이름은 유발이니 그는 수금과 퉁소를 잡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었으며 씰라는 두발가인을 낳았으니 그는 동철로 각양 날카로운 기계를 만드는 자요 두발가인의 누이는 나아마이었더라(창세기4:16-22)

가인의 후예에 대하여 무엇이라고 기록하였습니까? 그들이 하고 있는 일들, 그들이 무엇을 하였는가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성을 구축하고, 어떤 사람은 육축치는 자의 조상이 되었고, 어떤 이는 음악가입니다. 이런 것은 그들이 무엇을 했는가를 기록한 것입니다.

셋도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창세기4:26)

그 때에서야 그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고 했습니다. 이들이 그들의 신분 안에서 하나님을 믿기 시작한 가정입니다.

셋은 일백오 세에 에노스를 낳았고 에노스를 낳은 후 팔백칠 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그가 구백십이 세를 향수하고 죽었더라 에노스는 구십 세에 게난을 낳았고
(창세기4:6-9)

여기에서 이야기하지 않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들이 무엇을 하였는지 그 행위에 대하여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왜냐하면 그들이 무엇을 했느냐가 결코 중요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사는 사람들에게는 자신들이 무엇을 했는지가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자신의 신분을 하나님 안에서 찾는 사람들은 자신의 하는 일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어떤 사람을 만나서 이름을 물어본다면 그리고 이름 이상의 무엇인가를 알기를 원하신다면 물어보는 질문은 무엇입니까? 무슨 일을 하십니까? 세상의 모든 사람이 이런 방식으로 질문을 합니다.
“당신의 직업은 무엇입니까?”
“뇌 전문 의사입니다.”
“오 그렇습니까?”(놀라워하면서)
“당신의 직업은 무엇입니까?”
“저는 쓰레기를 치우는 사람입니다.”
그러면 “그래요!”(우습게 여기며) 하고 말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신분을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냐에 두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 나라에서는 신분의 가치가 여러분이 무엇을 하고 있느냐에 따라서 나오는 것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여러분의 가치입니다. 육적인 삶, 율법적인 삶에서는 무엇을 하고 있느냐를 강조하지만 은혜 아래서는 예수 안에 있는 나 자신이 중요한 것입니다. 세상의 사람들은 무엇을 하고 있는냐에 가치를 둡니다. 그러나 우리의 신분의 가치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은혜의 삶의 핵심은 예수 안에 사는 것입니다. 예수가 우리의 삶입니다. 율법 아래 사는 사람들은 ‘더 열심히 더 열심히’를 생각하지만, 은혜의 걸음을 걷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구원을 얻는 것은 노력해서 입니까? 믿어서 입니까? 우리는 믿음으로 사는 것이지 노력하며 사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아침에 일어났습니다. 마리아 집에서 주무셨습니다. 자매들이 조반 준비하는 소리가 들립니다. 냄새가 좋습니다. ‘오늘은 사역을 그만하고 쉬면 좋겠다, 그러나 악한 사탄 마귀가 있으니 쉬면 안되겠지, 하나님 아버지를 위하여 오늘은 무엇을 해야할까?’ 스케줄을 조정하기 시작합니다. ‘사람들에게 무엇을 설교할까? 하나님이 좋아하시니까 오늘을 병자를 많이 치유하여야겠다. 점심을 먹고 난 다음에는 귀신을 쫓아내야 겠다. 하나님이 그것을 좋아하시니까, 그 이후에는 장래식에 가서는 죽은 사람을 살려내야겠다. 그러면 오늘 하루를 멋진 하루가 될 거야 내가 하나님을 위하여 할 수 있는 것을 하니까? 하나님 내가 이런 일을 할 수 있도록 능력을 주세요.’ 이렇게 기도하겠습니까? 예수님이 이렇게 사역하셨다고 상상이나 할 수 있겠습니까? 아닙니다. 절대 아닙니다.
3. 은혜로 사는 삶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아침에 하나님과의 관계를 확인하시고 넘쳐흐르는 은혜로 하루하루를 살으셨습니다. 하나님과의 교통, 교통 안에 넘치는 은혜로 살았습니다.

내가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 듣는 대로 심판하노니 나는 나의 원대로 하려 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이의 원대로 하려는 고로 내 심판은 의로우니라(요한복음5:30)

예수님은 내가 스스로 하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 교훈은 내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것이니라.
(요한복음5:16)

이것은 나의 가르침이 아니다고 하십니다. 내가 아닌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내가 너희를 대하여 말하고 판단할 것이 많으나 나를 보내신 이가 참되시매 내가 그에게 들은 그것을 세상에게 말하노라 하시되(요한복음8:26)

예수께서 가라사대 하나님이 너희 아버지였으면 너희가 나를 사랑하였으리니 이는 내가 하나님께로 나서 왔음이라 나는 스스로 온 것이 아니요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이니라(요한복음8:32)

내가 내 자의로 말한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나의 말할 것과 이를 것을 친히 명령하여 주셨으니(요한복음12:49)

나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내 말을 지키지 아니하나니 너희의 듣는 말은 내 말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이니라(요한복음14:24)

예수님께 무엇을 말씀하시려고 하십니까? 내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바로 하나님께서 하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삶을 활기있게 한 근원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삶을 살게 한 근원은 무엇입니까? 자기가 노력하여서 하나님을 위하여 산 것이 아니고, 기사와 표적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말을 들으라 너희도 아는 바에 하나님께서 나사렛 예수로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을 너희 가운데서 베푸사 너희 앞에서 그를 증거하셨느니라(사도행전2:22)

성경은 기사와 이적들이 예수님을 통하여 나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을 위하여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를 통해서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제는 예수님의 경우와 우리를 비교해보겠습니다.

어떻게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과 친밀한 관계를 맺을 수 있습니까?

예수께서 또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요한복음20:21)

아버지께서 나를 통하여 역사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내는데 너희를 통하여 역사하시겠다는 것입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한복음15:5)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수 없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들이 아버지의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요한복음5:19)

만약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았다면 예수님께서 몇 가지의 기적을 행하셨을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요5:15절을 근거로 하면 전혀 못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이 아니십니까? 하나님이시기에 마음대로 할 수 있었을 텐데 하지 않았습니다. 그분은 하나님의 아들로 있었습니다. 아들이라는 것은 하나님께 완전히 의존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러분이 예수님이 나를 통하여 행할 것을 믿지 아니한다면 여러분은 과연 무엇을 할 수 있습니까? 아무 것도 없습니다. 적어도 설교는 할 수 있지 않을까? 아픈 사람을 방문하고 상담을 하며, 행정을 하며 많은 것을 할 수 있을텐데. 그러나 주님은 ‘너가 할 수 있는 것을 보며, 모든 것을 다 더 해보라 다 더하면 제로가 나온다. 아무 것도 없다’고 하십니다. 에수님께서는 나를 위해 살아달라고 명령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율법주의입니다. 그는 여러분이 그를 의지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분이 여러분을 안에서 여러분을 통해서 행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은혜입니다.
기독교인의 삶의 가장 중요한 것은 주님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가 아닙니다. 예수께서 우리의 삶 속에 들어오셔서 우리의 삶을 어떻게 표현하시는가가 중요합니다. 은혜의 걸음은 예수님이 우리의 삶 속에서 모든 것을 다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를 단순히 믿는 것입니다. 그분이 우리의 사역을 다 하십니다. 내가 어디에서 이 말씀을 전해도 대부분은 예수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들어오셔서 동행하시고 돕기를 원하신다고 말하면 동의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질문하는 것은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여 그를 통해 사는가입니다.

<연구과제>
1. 그리스도를 위해서 사는 것과 그리스도의 생명이 우리를 통하여 살도록 하는 것의
차이점은 무엇입니까? 율법과 은혜를 연관시켜서 이 두 가지를 어떻게 구별할 수
있습니까?

2. 한 사람을 더욱 경건하게 만드는데 있어서 공통적으로 제안할 수 있는 단계에는
어떤 것이 있겠습니까?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경건해 질 수 있습니까? 그 방법으로
당신은 당신의 삶 속에서 더욱 의로와지려고 시도해 보았습니까?

3. 가치체계를 중심으로 해서 사람의 생명을 세우는 생명에 대한 접근 방식은 왜
부적절합니까? 그리스도인들의 가치가 믿는 자의 생활 속에 뿌리내려져 있습니까?
그렇다면 왜 그렇습니까? 또는 왜 그렇지 않습니까?

4. 당신이 다인 자신에 대해서 좋게 느끼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용납하심을 바탕으로
한 성취행위의 의미를 정의해 보십시오.

5. 어떻게 예수님은 매일의 삶 속에서 사역하는 것들을 알았습니까? 예수님이 하나님을
섬긴 것과 같이 당신이 하나님 앞으로 나아갈 때 당신의 책임은 무엇입니까?








제 2 과 새벽을 바라보는 어두움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감당할 수 있는 것보다 무거운 짐들을 당신에게 짐 지울 것입니다. 특별히 하나님께서는 고난의 장소(낙심된 장소)로 이끌려고 시도할 때 더욱 그러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그 짐을 하나님이 져 주시기를 마침내 요청하기까지 당신이 견딜 수 없을 만큼 더 큰 짐을 지도록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목적은 이 깨어짐의 과정 속에서 당신으로 하여금 당신 자신의 자원을 다 소진하게 되는데 있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이야말로 내 삶에 있어 꼭 필요한 유일하신 자원임을 깨닫게 하려는 것입니다. 당신은 아직도 자신을 의지하는 어둠 속에 있지 않습니까?


어떻게 율법주의에서 해방되는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아래서 어떻게 능력을 발휘할 것인가를 질문합니다. 은혜를 경험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통과하기 위한 문이 있습니다. 이 문을 통과하지 않고서는 예수님이 우리를 통하여 하시고자 하는 기적들을 경험할 수 없습니다. 이 문의 이름은 깨어짐, 상한 심령입니다. 상한 심령이라는 것은 사람이 삶을 살아가면서 자기 자신에 대한 신뢰를 포기할 때 존재하는 조건입니다. 어떤이는 기독교인의 삶을 살기가 불가능하다고 이야기하곤 합니다. 이 사람은 처음에는 기독교인의 삶이 쉽다고 생각하다가 어느 정점에 와서는 기독교인의 삶이 힘들다는 것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내가 스스로 그러한 삶을 살기에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는 지점까지 와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삶을 살 수 있는 유일한 분이 있는데 그분은 바로 그리스도 자신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삶을 따라가야 되지만 그렇지 못함으로 우리는 이런 질문을 합니다. 만약 예수라면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하셨을까? 기독교인의 삶은 예수님의 삶을 모방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삶에 동참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어떻게 예수님의 삶을 모방할 수 있습니까?
제가 박노철 목사(통역)의 삶을 모방하려고 한다고 가정합시다. 그래서 이분의 행동을 관찰하고 이름도 한국 이름으로 바꾸고 스데반 박으로, 한국말을 배웁니다. 한국 음식을 먹습니다. 그리고 한국사람으로 행동하고 머리색깔도 바꾸고 해도 이 사람을 모방할 수 없습니다. 내가 많은 것을 모방해도 나는 한국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내가 한국 사람이 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있습니다. 내가 죽고 다시 박씨로 태어난다면 한국사람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내가 박목사의 삶을 모방할 수 없다면, 내가 어떻게 예수님의 삶을 모방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초청하셔서 그의 삶에 동참하도록 하셨습니다. 그가 낸 삶을 통해서 사시는 것, 그의 삶이 내 삶이 되는 것. 내가 어떻게 그렇게 될 수 있을까요? 그가 어떻게 내 안에 들어올 수 있을까요? 그것은 깨어짐 , 상한 심령을 통해서입니다. 내가 스스로 만족하려고 하는 마음을 언제 깨어버리십니까? 하나님의 도구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여러 도구 중에서 가장 효과적인 것은 고난입니다.

1. 우리의 삶에 있어서 고난의 현실
어떤 목사님은 기독교인은 고난을 당해서는 안된다고 말합니다. 고난 당하는 것은 믿음이 없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고난을 당한다면 절대로 승리를 거둔 것이 아니라고 설명하는 분이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에게 한가지 질문을 합니다. 여러분은 성경을 읽으십니까? 이 성경을 읽으시면서 여러분의 감정과 반대되는 것을 읽어본적이 있습니까? 여러분의 지식과 반대되는 것을 발견한 적이 있습니까? 느낌이 아니라 성경이 이야기 하는 것을 믿으십니까? 설교와 성경이 상반되는 이야기를 하고있다면 설교를 믿을 것입니까? 성경을 믿을 것입니까? 성경은 진리입니다. 성경이 상한 심령에 대하여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우리가 당하는 고난에 대하여 이야기 합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시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베드로전서4:12-13)

여러분의 삶 속에 문제가 생겼을 때 어떤 태도를 취하라고 말씀하십니까? 어려움 당한 것을 이상한 일처럼 논해야 합니까? 성경은 놀라지 말라고 말합니다. 도리어 그리스도 안에서 즐거워하라는 것입니다. 이 고난을 통하여 주시는 하나님의 계시를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이야기하는 것은 여러분의 삶에 어려움이 올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상히 여기지 말고 도리어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것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를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고난은 하나님의 영광을 계시하기 위한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의 계시가 무엇입니까? 그 계시가 다가온다면 기뻐하고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처음 이 말을 들을 때 천국에 대한 이야기가 아닌가하고 착각했습니다. 이러한 기쁨으로 기뻐할 수 있는 것은 천국에서만 가능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어떤 사람이 이런 놀라운 기쁨을 가지고 그렇게 기뻐할 수 있습니까? 베드로가 말한 기쁨의 일은 천국이 아닌 이 세상의 일입니다. 지금 하나님의 영광을 설명하고 있는데 그것이 무엇입니까?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 안에 있는 그리스도가 여러분의 영광의 계시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삶 속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하나님의 계시입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의 신분을 나타내는 중요한 구절입니다. 이 계시를 받으신다면 하나님 앞에서 여러분은 기뻐할 것입니다. 이 계시가 어떻게 다가 옵니까? 이러한 계시가 고난을 통하여 온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고난은 하나님이 보내시는 사자일수 있다는 것입니다. 고난은 우리의 모든 것을 포기하는 도구로서 쓰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살기 위해 스스로 재 헌신해 보신 기억이 있습니까? 얼마나 많이 그런 일을 해보셨습니까? 그리스도 예수 안에 내가 있었지만 저는 그분을 위해 얼마나 많이 재 헌신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나의 가장 밑바닥에는 그리스도를 위해 살기 원하는 내 자신이 있었습니다. 성경은 그리스도를 위해 재 헌신하라고 요구한 적이 없습니다. 주님께서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라고 했지 자기를 재 헌신하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 약해진 나를 발견하는 것입니다. 나의 약함을 발견하고 나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것을 고백하게 하는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 앞에서 사용되기 위해서 더욱 강해져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하나님께 사용받기 위햬서는 더욱 강해져야 하는 것이 아니라 더욱 약해져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나의 강한 것이 아니라 나의 약한 것을 인하여 더욱 자랑하리라고 말합니다. 고난은 우리를 약하게 하는 것으로서 하나님의 계시로 다가 올수 있습니다.

1) 고난은 모든 인류에게 보편적으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인생은 고난을 위하여 났나니 불티가 위로 날음 같으니라(욥기5:7)

여인에게서 난 사람은 사는 날이 적고 괴로움이 가득하며(욥기14:1)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요한복음16:33)

예수님께서는 세상에 있는 자는 환란을 당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왜 내가 고난을 당해야 하는지 묻습니다. 고난은 내가 한 일 때문에 오는 것입니까? 내가 무슨 큰 잘못을 했기에 이런 고난이 옵니까? 당신은 적어도 태어났잖아요. 사람이 태어났다는 의미는 고난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모든 인류에게 적용되는 보편적인 사실입니다.

2) 믿는 자들도 이 고난에서 제외될 수 없습니다.
우리 안에 있는 이 상처와 아픔은 믿음과는 상관이 없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런 사람들은 성경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들이 고난을 당한다는 사실만으로 예수님을 믿지 않겠다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당하는 고난을 말씀 드리겠습니다.

욥이 대답하여 가로되 내가 오늘도 혹독히 원망하니 받는 재앙이 탄식보다 중함이니라 내가 어찌하면 하나님 발견할 곳을 알꼬 그리하면 그 보좌 앞에 나아가서 그 앞에서 호소하며 변백할 말을 입에 채우고 내게 대답하시는 말씀을 내가 알고 내게 이르시는 것을 내가 깨달으리라 그가 큰 권능을 가지시고 나로 더불어 다투실까 아니라 도리어 내 말을 들으시리라 거기서는 정직자가 그와 변론할 수 있은즉 내가 심판자에게서 영영히 벗어나리라 그런데 내가 앞으로 가도 그가 아니 계시고 뒤로 가도 보이지 아니하며 그가 왼편에서 일하시나 내가 만날 수 없고 그가 오른편으로 돌이키시나 뵈올 수 없구나(욥기23:1-9)

질문을 하나 하겠습니다. 욥은 믿음의 사람이었습니까? 아니었습니까? 그는 하나님을 믿고 있었습니까? 욥이 고난을 당하고 있을 때의 느낌을 나누고 싶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그를 적대하고 있다고 느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손이 나를 누르고 있다고 느낌니다. 자라나는 믿음을 하나님께서 누르신다고 느낌니다. 이것이 바로 욥이 느끼고 있는 감정입니다. 욥과 같은 느낌을 가져본 적이 있습니까? 욥은 지속적인 절망감에서 살았습니다. 어떻게 하나님을 찾을 수 있을까? 그의 상황을 스스로 절대로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혀 이해 할 수 없었습니다. 이러한 일을 경험한 적이 있습니까? 환란과 격정이 다가왔을 때, 하나님이 적대자로 서 있고, 내가 하나님께 직접 말할 수 있다면, 왜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느냐고 이야기 할 수 있기를 바라는 것, 이것이 바로 욥이 느끼는 감정입니다. 욥이 정말 하나님을 필요로 할 때 하나님은 숨어있었던 것 같습니다. 8,9절에 보니 앞으로 가도 뒤로 가도 하나님을 찾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좌를 봐도 우를 봐도 없었습니다. 뒤로 보아도 앞을 보아도 없었습니다. 내가 가장 필요로 할 때 하나님은 왜 안계시는가? 이것이 바로 욥이 느낀 것입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욥은 대단한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10절에서 욥은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라고 말합니다. 그의 느낌은 하나님이 그를 대적하는 것 같고 그를 누른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믿음은 하나님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고난을 당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구약이이니까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신약으로 가보겠습니다.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우리 마음에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뢰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뢰하게 하심이라(고린도 후서1:8-9)

사도바울이 대단한 믿음의 소유자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감당치 못할 시험도 주실 수 있다는 사실을 생각합니까?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감당할 수 없는 시험을 주신다는 사실을 증명해 보겠습니다. 분명히 성경을 믿으시죠? 성경이 이야기하는 것을 말하겠습니다.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지금 사도바울은 굉장한 어려움 속에 있습니다. 그는 삶을 불살라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봉사하고 있는데 그리고 그가 문제를 일으킨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고난이 왔습니다. 그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았다.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정도의 문제가 아닌 감당치 못할 문제였다고 합니다. 그의 문제는 감당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 다음절에 힘에 지나도록, 즉 내 능력 밖의 일을 주셨다고 합니다. 한글성경에는 내 힘에 지나도록 나의 고난의 짐이 감당할 수 없는 것다는 뜻으로 나왔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에게 힘을 공급해주시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 여러분의 힘이시라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에는 차이점이 있습니다.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시험을 주신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감당할 수 없는 유혹을 주신다는 말이 아니라 이것은 나의 고난이요 짐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주신 짐입니다. 이것은 나의 능력 밖의 일입니다. 내가 견딜 수 없는 것입니다.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성경을 잘 보시고 내가 감당할 수 없는 고난의 짐을 하나님이 허락하셨다는 것을 이해하고 넘어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질문이 있습니다. 여러분의 힘에 지나도록 하나님이 주신 고난이 이해가 됩니까?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사실입니다. 사도 바울은 계속이야기 합니다. 우리가 살 소망까지 끊어졌다. 삶에 대한 완전한 절망입니다. 현대 성경을 따라서 이해해 봅시다. 살 소망이 끊어졌다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께서 주신 고난이 내 능력 밖의 것이기에 내가 죽고싶다는 것이 그의 고백입니다. 믿음의 사람 바울이 어떻게 이런 말을 할 수 있느냐고 생각하십니까? 9절을 보십시오. 우리 마음에 사형선고를 받았으니. 그가 만지는 모든 것이 다 죽어갑니다. 여러분 사역하시면서 여러분이 만지는 것마다 다 죽어 가는 것을 경험한 적이 있습니까? 목사로서 사역하는 여러분에게 목사로서 감당할 수 없는 고난이 옵니다. 그 고난은 목사로서 감당할 수 없는 것입니다. 얼마나 힘든지 ‘예수님 차라리 나를 천국으로 데려가 주세요’라고 말할 정도까지 힘이 듭니다. 여러분이 만지는 것마다 죽음에 대하여 느낌니다. 하나님은 왜 이런 일을 주셨을 까요? 왜 사도 바울에게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요? 왜 하나님께서는 나와 여러분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게 하셨을까요? 9절에 답이 있습니다.

우리 마음에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뢰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뢰하게 하심이라(고린도후서1:9)

사도바울은 신적인 뜻을 이행하는데 있어서 어려움을 당했습니다. 이 고난은 바울을 약하게 만들었습니다. 자신에 대하여 모든 자신감을 상실하는 상태까지 왔습니다. 예수님이여 나에게 능력을 주옵소서가 아니라 예수님이 나의 능력이라는 사실을 깨달을 때까지,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이 스스로 믿는 그 것을 깨트리기까지 가기를 원하십니다.
나의 사명은 목회를 이 정도까지 키워놓는 것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나의 교회의 사역을 일으키는 것은 여러분의 사역이 아닙니다. 제가 담임목사를 할 때 이렇게 말했습니다. “제가 실수 했습니다. 제가 제 사역을 일으켜 세우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이곳에 보내신 것은 나의 사역을 크게 세우라는 것으로 이해하였습니다. 그러나 내가 여러분에게 용서를 빌어야 하겠습니다.” 제가 이렇게 말했을 때, 그들은 제가 사표를 쓸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저의 잘못은 제가 사역을 크게 일으켜야 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반석에 내 교회를 내가 세우리라. 음부의 권세가 침범하지 못하리라. 여러분이 이 진리를 깨닫게 된다면 많은 스트레스에서 해방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나무에 연결되어 있는 가지 그 자체입니다. 여러분은 열매를 맺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스스로가 그 열매를 만들어 내는 것을 절대로 아닙니다. 예수님 만이 열매를 만들어 냅니다. 복숭아 과수원 이야기를 했지요. 어떤 복숭아는 크고 탐스러운 고 열매를 맺었습니다. 어떤 나무는 작은 열매를 맺었습니다. 작은 복숭아에게 가서 너는 창피한 줄 알아라 너는 왜 저것만큼 크지 못했느냐?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까? 이 두 복숭아는 자기의 할 일을 한 것입니다. 바로 자기 나무에 연결되어 쉬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소명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예수님의 품에서 안식하는 것입니다. 마태 11장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내 멍에를 와서 매라 내 멍에는 쉽고 가볍다’고 말하십니다. 그분과 함께 하는 삶은 아주 쉽고 가볍다는 것을 경험해본 적이 있습니까? 예수님과 함께하고 그분을 따른 것이 어떻게 쉬울 수 있을까? 나는 이 사실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으면 아마도 그 사람을 죽는데 까지 때려 주었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삶은 안식이이요, 가볍고 쉬운 것이라고 하십니다. 이 말이 게으르다는 것입니까? 결코 아닙니다. 이 말의 뜻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안식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우리를 통해서 모든 일을 다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내 삶 속에 오셔서 내가 아주 무기력하다는 것을 확신시켜 주셨습니다. 그 이후에 예수님께서 나를 통하여 하실 사역에 대하여 비전을 갖게되었습니다. 나는 예수님을 의지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이후에 나의 사역의 결과가 다른 사람의 눈에 보기 좋든지 나쁘든지, 오직 예수님을 의지하고 그분이 교회를 세우시도록 했습니다.
어느날 한 사람이 제 사무실에 찾아왔습니다. 그는 빌립이라는 아프리카에서 온 사람이었습니다. 빌립은 예수님을 모르는 사람이었습니다. 나는 예수님을 그에게 소개하였습니다. 그날 이후 그는 매주 화요일 마다 내 사무실에 와서 제자 훈련을 받았습니다. 빌립은 아프리카로 돌아가서는 의료선교를 하려고 했습니다. 아프리카를 돌아가기 전에 맥베이 목사님이 말씀하는 만큼의 성경지식을 얻어 가기를 원했습니다. 6주간 성경공부를 하고 떠나기 전에 그가 나에게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매주 성경공부를 할 때마다 저는 모든 말씀을 받아 적었습니다. 내가 왜 이렇게 하는지 아십니까?”
저는 아프리카로 가서 가르치려는 것이 아니냐하고 대답했습니다.
“저는 목사님의 말씀을 바로 불어로 적었습니다. 불어로 적어서 바로 아프리카의 고향으로 편지를 보냈다는 것입니다.” 자기의 편지는 동네의 추장이 매주 받아보았다는 것입니다. 추장은 동네의 사람들을 다 모아서 그 말씀을 가르쳤다는 것입니다. 그 이후 동네의 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얻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들에게 많은 질문들이 있는데 추장이 대답을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추장이 계속 편지를 보내오는데 자기는 대답을 할 수 없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 질문들을 영어로 번역해 줄 테니 그 사람들에게 직접 답을 해 줄 수 있느냐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굉장한 일이었습니다. 나는 아틀란타 조지아에서 한 사람하고 이야기만 하고 있었는데 하나님의 역사가 아프리카에서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 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여러분을 통하여 역사하실 것입니다. 여러분이 평생을 통하여 이루실 일을 예수님은 하루만에 하십니다. 여러분은 자신의 무능력을 시인하고 그분 앞에 와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사용되기 위해서는 약해져야 합니다. 우리는 많은 사람에게 내가 강해질 주 있도록 기도해 달라고 부탁을 합니다. 그러나 저는 여러분에게 더 좋은 것을 주고 싶습니다. 여러분이 더욱 약해지도록 기도하겠습니다.

2. 고난의 이유에 대하여 생각해 보십시다.
하나님은 우리의 삶 가운데 고난을 왜 허락하실까요?

1) 하나님은 우리의 육신의 모습을 노출시키기 위해 고난을 사용하십니다.
교회를 스스로 세워 보시려고 노력하고 계십니까? 저는 내 노력으로 교회를 세워보려고 했습니다. 언젠가 하루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예수라고 착각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나는 하나님이 아니잖아?’ 우리가 할 일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나를 통하여 그가 하고 싶은 일을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고난을 통하여 여러분의 능력과 의지했던 것을 포기하게 하십니다. 그것은 바로 육신이었습니다.

육신이란 한 인간이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을 신뢰하지 않을 때 자기의 인생을 관리하려는 기술들에 견줄 수 있음이라, 그것은 긍정적으로 보이기도 하고 부정적으로 보이기도 한다. 육은 긍정적으로 보일 수도 있고 부정적으로 보일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이 술을 안마시기 때문에, 외도를 아니하고, 훔치지 않았기 때문에 육신적이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육적이라는 것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여러분 자신을 의지하고 사는 모든 것을 육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두 형제에 관하여 생각해 보겠습니다. 이것은 탕자와 그의 형의 이야기입니다. 탕자는 아버지의 유산을 받아서 탕진하였습니다. 그는 아버지와의 좋은 하모니를 이루고 산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자기의 만족을 이루어 보려는 길로 들어섰습니다. 그가 먼 나라에 가서 살 때도 그는 아버지의 아들이었습니까? 그렇습니다. 그가 탕진했을 때 아버지가 화를 내고 있었습니까? 아닙니다. 그가 먼 나라에 있었을 때 아버지의 마음이 상해 있었을까요? 예 그랬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버지가 슬퍼하신 것은 돈 때문이 아니라 아들이 당하는 고난에 대하여 마음이 상하신 것입니다. 그가 바로 육적인 삶을 따라 갔다는 것, 이것이 아버지를 슬프게 했습니다. 아들이 돼지치기가 되었을 때, 그 자리에서 그는 내 아버지의 종이라도 나보다는 낫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버지에게 가서 종으로라도 나를 받아달라고 부탁을 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가기 전에 아버지에게 해야 할 말을 연습하였습니다. ‘나는 아버지의 아들이 되는 것을 감당할 수 없으니 나를 종으로 받아 주십시오’ 라고 이야기를 하려고 준비를 하였습니다. ‘나를 아들로 받아주지 않아도 좋습니다. 그러나 종으로라도 받아준다면 최선을 다해 섬기겠습니다.’ 이 탕자는 아버지와의 관계에 대하여 아주 잘못된 이해를 갖고 있었습니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밖으로 나갔다가 다시 주님께 돌아올 때 내가 이제는 더 잘 섬길 수 있을 것이라는 마음으로 돌아옵니다. 탕자가 상거가 먼데 아버지가 보았습니다. 아들은 ‘나는 당신을 아버지로 섬길 수 없습니다.’ 라고 말하려는데 아버지가 아들의 입을 막습니다. 그리고 아버지는 지체하지 않고 사람들에게 송아지를 잡고 좋은 옷을 준비하고 가락지를 끼우라고 명령합니다. 아들이 연습한 말을 아직 꺼내지도 못하였는데 이러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아들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아버지가 탕자를 받아들인 것은 종으로 잘 섬기겠다고 말했기 때문에 받아들인 것이 아닙니다. 아버지는 그가 아들이었기 때문에 받아주었던 것입니다. 이 관계는 절대로 변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 탕자는 아버지는 나를 거부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는 우리가 하나님을 어떻게 섬겼는가 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시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받아주신 것은 우리의 행위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더 큰 교회를 멋있게 부흥시킨 다면 하나님이 여러분을 더욱 사랑하실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하나님의 사랑은 여러분의 행위에 달려있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다른 아들이 있습니다. 큰 아들은 잔치에 들어가기를 거부합니다. 화가 났습니다. 그는 율법주의자입니다.
“너는 왜 들어오지 않니?”
“당신의 재산을 다 탕진한 아들이 돌아오니까 이런 잔치를 열어줍니까? 나는 수년동안 아버지를 섬겼는데 이와같은 잔치를 베풀어 준 적이 없잖습니까? 송아지를 잡아서 내 친구들을 위하여 잔치를 벌인 적이 없잖습니까?”
큰 아들은 나의 섬김이 모자랐기 때문에 이런 일이 일어나는구나 생각했습니다. 장남은 자기가 열심히 했기에 당연히 잔치를 열어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탕자와 같이 장남도 똑같이 잘못된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탕자나 장남에 대하여 그들이 하는 일을 가지고 그들을 대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아버지가 그들을 사랑한 이유는 그들은 아들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여러분을 그 정도로 사랑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여러분에게 이러한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릴렉스하십시오. 하나님의 사랑의 강도를 변하게 할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여러분이 무엇을 하든 간에 그 사랑을 강하게 할 수도 없고 약하게 할 수도 없습니다. 그 사랑은 여러분의 행위에 기인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에 상관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은 변할 수 있습니다. 타락할 수도 있고 신실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변함없이 사랑하십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보면 육적인 삶은 부정적으로 보일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탕자의 이야기입니다. 육적인 삶이 긍정적으로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장남의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그도 역시 육적인 삶을 걷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교회에서 술취하고 방탕한 사람을 불쌍히 여기고 기도하고자 합니다. 그래서 긍정적으로 보이는 육적인 사람들이 모여서 기도를 합니다. 그러나 술취한 육적인 사람이나, 교회 안에 있는 율법적인 육적인 사람이나 똑같다는 것입니다. 육이라는 것은 내 능력으로 내가 살아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두 개의 가지들은 무엇이었습니까?
이것이 바로 선악과의 두가지의 양면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창세기2:8-9)

이 나무는 선을 알게도 하고 악을 알게도 합니다. 이 나무에는 두가지의 가지가 있습니다. 선과 악의 가지가 있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상상해 보십니다. 어느날 아침에 아담이 자고 있었습니다. 이브가 아담을 깨웠습니다.
“자는 모습이 사랑스러워서 지금까지 깨우지 않았어요! 여기 과일이 있어요!”
아담이 일어나서 화를 냈습니다.
“나를 깨우다니, 어떻게 과일을 갖다놓고 나를 깨울 수 있어! 이 과일로 나를 괴롭게 하려는 거지!”
그러면서 과일 접시를 던져버렸습니다. 하와는 숲으로 도망갔습니다. 이런 아담의 행동은 선한 것입니까? 악한 것입니까? 악한 것이지요. 하나님이 이 모습을 모시고 기뻐하셨을까요? 아니지요. 나중에 아담이 후회를 하였습니다. 하와에게 잘못했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말합니다.
“내일 잘 대해주고 여왕으로 만들어 줄게.”
그래서 다음날 하와는 침대에 누워있었고 아담이 식사를 준비하고 하루종일 여왕으로 대해줍니다. 그 날밤 하와는 아담에게 당신은 너무나 멋진 나의 왕자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날 아담은 선을 행했습니까? 악을 행했습니까? 그러면 하나님은 아담의 행한 일을 보고 기뻐하셨을까요? 아닙니다. 왜 하나님은 기뻐하지 않습니까? 첫날에는 좀 나쁜 일을 했지만 그 다음날에는 좋은 일을 행하지 않았습니까? 첫날에는 산악과의 악의 가지를 택했고 그 다음날에는 선한 가지를 택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그 이틀을 통하여 하나님은 기뻐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이틀동안 선악과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율법주의는 가지를 선으로 바꾸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은혜는 나무 자체를 바꾸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아멘. 내가 율법주의자의 목사였을 때, 이렇게 설교했습니다. 나쁜 행동을 그만두십시오, 선한 행동을 하십시오. 안주머니의 담배를 갖다 버리십시오, 술을 그만 마시십시오. 아내에게 잘하십시오. 즉 행위, 행위를 요구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는, 예수님을 모시고 예수님이 살게 한 사람은 예수님이 그의 행위를 변화시킬 것입니다. 반드시 변할 것입니다. 규율과 법칙을 강조하지 않아도 예수님과의 관계 때문에 행동이 변화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나무를 바꾸시려는 것이지 가지를 바꾸시려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성도를 가르칠 때 그들의 행위를 바꾸려고 하지 말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그들의 신분에 대하여 가르치는 것이 어떻습니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과 사랑의 관계에 빠져있는 자신의 모습을 보게 하십시오. 나의 삶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삶이라는 것을 보게 하십시오. 그리고 아주 경건한 삶을 사는 사람들을 보여 주십시오. 그들은 더 이상 규율 때문이 아니라 자신이 원하기 때문에 그렇게 살고 있습니다. 의무적으로 해야 되기 때문이 아니라 자기가 원하기 때문입니다.
자기 스스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계속 더욱 열심히 하려고 합니다. 그리고는 계속 실패에 빠집니다. 그들을 자유하게 해 주십시오. 율법주의의 견고한 쇠창살을 깨 부십시오. 교회에서 진리를 말씀하십시오. 목사인 나도 그렇게 살수 없다고 하십시오. 그러나 누군가가 그런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 왔다고 말씀하십시오. 그분은 바로 그리스도 자신입니다. 그가 우리를 통하여 사실 것입니다. 그를 의지하십시오. 여러분 스스로 하실 수 있다는 자신감을 버리십시오. 내가 할 수 있다는 것을 버리십시오.

2) 고난은 깨어짐을 위한 촉매제일 수 있습니다.
이것을 인하여 하나님이 고난을 허락하여 주십니다. 상한 심령, 깨어짐은 한 사람이 삶을 다스리는 자기의 능력 속에서 모든 신뢰를 포기할 때 존재하는 조건입니다.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마태복음16:25)

우리 중의 몇 사람은 이런 일을 꼭 해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의 삶 속에서 여러분의 손을 때십시오! 교회 사역에서 손을 떼십시오! 더 이상 나의 교회가 아님을 고백하십시오! 예수님의 교회입니다. 내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결과가 나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에 의해서 나옵니다. 그래서 모든 일에 예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됩니다. 모든 결과에 따라서 예수님 만이 영광을 받게됩니다. 모든 것이 내 손에서 떠났기 때문입니다.
“여기 있습니다. 모두 다 예수님의 것입니다. 다 가지십시오. 예수님의 원하시는 뜻을 이루십시오. 내 삶이 여기 있습니다. 내 비전이 여기 있습니다. 나는 죽을 수 밖에 없습니다. 내가 갖고 있는 모든 개인적인 야망을 버립니다. 여기 내 삶이 있습니다. 내 삶을 사용하여 주십시오. 나를 잡아주시고, 내 삶을 어느 곳에든 사용하십시오. 내 삶은 주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더 이상 강해지기를 시도하는 일에 지쳤습니다. 주님께서 일하시도록 나는 더 약해지기를 원합니다.”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고린도전서1:26-29)

하나님은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셨습니다. 하나님 나를 사용하여주옵소서 기도해 본 적이 있으시죠. 그렇다면 고난이 올 때에 놀라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고난을 통하여 깨어지고 약하여지지 아니하면 하나님이 여러분을 사용할 수 없습니다.
저는 8살 때부터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나는 기독교 가정에서 자랐고 저는 10살이 되었을 때 설교자가 되어야 할 것을 깨닭았습니다. 16살 되었을 대 성경을 가르쳤습니다. 극장이나 볼링장 주차장에서 설교를 했습니다. 내가 19살 되었을 때 담임목사가 되었습니다. 미국사람들은 한국사람보다 비교적 어린나이에 목사가 되지만 19살에 목사가 된 것은 미국에서도 드문 일입니다. 그래서 저는 19살의 나이에 얼마나 나이 들어 보이려 했는지 모릅니다. 머리에 염색도 해보았습니다. 제가 지역교회 담임목사로서 21년간 섬겼습니다. 제가 섬기는 교회에 주님께서 너무나 많은 복을 주셨습니다. 교회가 성장했습니다. 사람들은 구원을 받았고 여러 가지 일을 했습니다. 남부 알라바마에서 교회를 하였고 아주 건강하게 성장했습니다. 이 지역에서 우리교회만큼 빨리 성장하는 교회는 없었습니다. 우리는 많은 사람들에게 침례를 베풀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았습니다. 문제나 이슈가 생길 때 많은 사람들이 나에게 왔고 저는 신문이나 방송에 나가기도 대답하기도 했습니다. 한번은 우리 도시에 음란서적을 들여오는 일을 맡았습니다. 저는 시 의회에 가서 이 일이 하나님 앞에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사람들에게 설교를 하였습니다. 그 다음날에는 신문 일면에 저의 얼굴이 빌리 그레함 처럼 나왔습니다. 그 처럼 크게 써주실 기대를 갖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열심히 하고 있는데 조지아 주의 어떤 교회 사람들이 전화를 했습니다. 목사님의 설교를 듣고 우리교회의 담임목사로 모시고 싶다는 전화를 받았습니다. 이런 제의를 이미 여러차례 받았고 제가 거절을 하였습니다만 이번 만큼은 이상하게 허락을 하였습니다. 주일날 다섯 사람이 왔고 그 사람들이 설교를 듣고 이야기를 하게되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아내와 함께 기도할 때 하나님깨서 우리를 그리로 인도하는 것을 감지하였습니다. 떠나고 싶지 않았지만 주님께서 그쪽으로 인도함을 느꼈기 때문에 할 수 없었습니다. 섬기던 교회에서 제가 떠난다는 광고를 하였을 때 모든 사람들은 울기 시작하였고 나도 울었습니다. 나는 가기 싫었지만 하나님께서 가게 하였습니다. 떠나기 전날 자정 쯤, 모든 짐이 떠난 빈 방에서 기도하였습니다. 그 다음날 우리 가족 모두는 차에 타고 조지아로 떠나게 되었습니다. 도시를 빠져 나오는 데 거기에는 큰 프랑카드가 붙어 있었습니다. 몇 명의 교인들이 밤에 걸어 놓은 것입니다. ‘스티브 목사님 제발 마음을 바꾸세요.’ 나도 아내도 그것을 보고 함께 울었습니다. 좀 더 가다보니 파랑카드가 하나 더 있었습니다. ‘아직 늦지 않았습니다. 목사님!’ 좀더 가다 보니 또 하나의 프랑카드가 있었습니다. ‘제발 가지 마세요.’ 저는 많이 울었습니다. 마지막 도시를 눈물로 빠져나오고 고속도로로 올라가는 길에 ‘아틀란타에 가시면 거기서 성공적인 목회를 하시기를 원합니다. 우리는 목사님을 사랑합니다’라고 써있었습니다. 우리는 3시간 동안 고속도로를 달리면서 내내 울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조지아에 들어갔을 때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곳에 보내셨다는 기대감을 가지고 들어갔습니다. 여러분 혹시 찰스 스탠리 목사님을 아십니까? 그분과 같은 동네에 살고 있었습니다. 그분은 유명하고 나도 존경하는 사람이지만 미안하게도 내가 이곳에 왔으니 그분은 다른 곳으로 옮겨야만 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우리교회가 부흥하면 그 교회로 갈사람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저의 교회에 가서 목회를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내가 누구인지를 모르고 있었습니다. 내 심장과 영혼은 싱싱했습니다. 저는 주님을 너무나 사랑했습니다. 그러나 나는 율법주의자 였습니다. 나는 주님을 위해서 무엇이든 하고 싶었습니다. 3,4개월이 지나면서 교회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나를 당황하게 만들었습니다. 왜냐하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너무나 이상했습니다. 내가 가는 곳마다 교회가 성장했는데 이교회는 왜이럴까? 이교회는 성장하지 않았습니다. 교회의 리더들을 모아놓고 이 도시를 구원하자고 하였습니다. 교회성장프로그램을 가져와서 열심히 하였습니다. 열심히 하였는데도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내가 오기 전에 5년 동안 이 교회는 계속 감소하고 있었지만 내가 온 이후에도 그 감소는 계속되고 있었습니다. 나는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낙심하게 되었습니다. 나는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나를 도와주십시오. 나를 강하게 해주십시오. 나는 낙심하였습니다.’ 유명한 강사를 모시고 부흥회를 하면서 사람들을 불러 모으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나는 우울증에 걸릴 정도가 되었습니다. 결국에는 이 회중들이 나를 싫어한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내가 그들에게 말할 수 없는 문제점은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바로 나도 그들을 좋아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서로 안 좋아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 목사가 알라바마로 다시 돌아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고 나도 알라바마도 돌아가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 무척 힘들었습니다. 처음에 이곳에 왔을 때 일년이 지난 후 이 교회의 상태에 대하여 보고하기로 약속하였습니다. 그러나 막상 일년 후 보고해야 할 모든 통계는 감소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나는 어떻게 할지 몰랐습니다. 나는분명히 회중들에게 보고하기로 했는데, 진실을 말하기가 힘들었습니다.
1990년 10월 6일 이었습니다. 그 다음날에는 이 모든 통계에 대하여 보고하기로 되어있었습니다. 토요일이 지나가고 주일 새벽2시경이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저는 사무실 벽에 얼굴을 대고 울고 있었습니다. 심각한 마음으로 울고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이 보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마음껏 울었습니다. ‘하나님 나는 정말 이해 할 수 없습니다. 내게 어떻게 이럴 수 있습니까? 알라바마에서는 교회가 잘되었는데 여기서는 교회가 죽어가고 있잖습니까? 그곳에서는 사람들이 나를 얼마나 사랑했습니까? 그런데 여기 있는 사람들은 나를 사랑하지 않습니다. 나를 왜 이곳으로 데리고 왔습니까? 교회를 죽이려고 데리고 왔습니까?’ 나는 너무 화가 났습니다. 하나님을 고소하는 말을 하였습니다. “하나님 내 삶의 전부를 드렸잖아요. 16살 때부터 메시지를 전했잖아요. 도데체 나에게 원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 때 너무나 놀랍게도 하나님께서 나에게 응답하셨습니다. 생각속으로 왔지만 너무나 크게 들렸습니다.
“스티브야 나는 너를 원한다. 오직 너를”
하나님은 나를 통해서 여러 가지 사역을 하고 큰 교회를 일으키시려고 부르신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 때에서야 비로서 하나님이 나를 보고 기대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식모를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신부를 원하고 계셨던 것입이다. 제가 그 음성을 듣고 나서 컴퓨터에 이렇게 글을 썼습니다. 나의 기도를 적었습니다. 27쪽의 왼쪽에 있는 항목들은 내가 하나님 앞에 완전히 항복하겠다는 사항들입니다. 오른쪽에 있는 것들은 나의 포기할 권리들입니다. 즐거운 환경을 가질 권리를 포기하였습니다. 받아들일 권리, 성공해야할 권리, 결과를 보아야 되는 권리, 사랑 받아야 할 권리, 이 모든 것들에 대하여 마음을 비웠습니다. 이 모든 것을 적고 나서 마지막에 부분에 와서는 내 삶은 마치 아무것도 적혀지지 않은 깨끗한 종이 같았습니다. 내가 스스로 기대고 있던 모든 것들에 대하여 나를 깨끗케 하였습니다. 그리고 제일 밑에다가 싸인을 하고 날자를 적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이러한 기도를 하였습니다.
(나에게 나와 함께 내 안에 나를 위하여 나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행하시고자 하는 어떤 것이라도 허용하겠습니다. 나는 한 때 이 권리들이 나의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이 권리들이 하나님께 속해 있으며, 그분의 재량 안에 있음을 선언합니다.)
그리고 1990년 10월 6일 날짜를 쓰고 내 이름을 서명하였습니다.
깨어짐이라는 것에 대하여 질문하겠습니다. 여러분 이 깨어짐의 장소에 와 계십니까? 아니면 사역들을 여러분의 손에 가지고 계십니까? 저는 목사님들에게 항상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여러분의 사역은 결국 여러분을 죽일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역은 여러분에게 생명을 주실 것입니다. 여러분의 사역은 누구 것입니까? 여러분의 것입니까? 하나님의 것입니까? 우리의 삶 가운데는 깨어짐의 결과들이 있습니다. 여러분의 삶을 경영하려는 의지를 내려 놓으십시오. 우리는 가르치려고 하지요? 우리는 하나님에 대하여 더 배가 고파져야 합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의 상황을 도와주시려고 오신 분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어려움에 부딪혔을 때 힘을 달라고 하지만 하나님은 힘을 주시지 않습니다. 여러분을 더 약하게 만들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이 구하는 그 무엇이 아니라 여러분에게 가장 중요한 것을 주고 싶으시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있었던 이야기를 하고 마치겠습니다. 데이빗은 저의 막내 아들인데 지금은 21살이 되었습니다. 3살적에 한밤중에 울기 시작하였습니다. 아내와 함께 아이의 방에 가보니 너무 힘들어 하고 있었습니다. 왜 그런지 몰랐지만 병원에 빨리 달려가야 할 상황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저에게는 4명의 자녀가 있었는데 모두가 어렸습니다. 아내는 나머지 3명의 자녀를 데리고 있고 나는 데이빗을 데리고 병원으로 갔습니다. 의사가 말하기를 ‘장에 문제가 있어서 복통을 일으키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오랫동안 쌓인 숙변들이 떨어지면서 살점이 떨어져 나오기 때문에 무척 아플 것’이라고 했습니다. 심각한 병이냐고 물으니 심각해 질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두 가지가 있다고했 습니다. 장 안에 무엇인가를 집어넣어서 청소하는 방법과 무엇을 먹어서 해결하는 방법이었습니다. 다른 방법은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장 청소를 하자고 했습니다. 데이빗을 침대에 올리고 장에 무엇인가를 집어넣기 시작했습니다. . 아들이 울면서 소리질렀습니다. 의사가 “맥베이씨 이 아이를 꽉잡아 주십시오.” 나는 아들에게 가서 두 팔로 아들의 두 어깨를 짖 눌렀습니다. 의사는 치료를 시작했습니다. 데이빗이 울면서 말했습니다.
“아빠!! 이 사람이 이렇게 못하게 해주세요. 아빠 이 사람을 멈추게 해주세요. 제발 너무 아파요 그만해요!”
한참을 그러다가 울기를 그친 데이빗이 내 얼굴을 정면으로 쳐다보았습니다.
“아빠 왜 저 사람을 말리지 았어요?”
3살난 아이에게 어떻게 설명하겠습니까? 어떻게 이해시키겠습니까? 나는 울기 시작했습니다. 그를 짖누르면서 데이빗 “나만 믿어, 아빠를 믿어 이렇게 해야만 돼!” 제 삶 속에서 이렇게 하나님께 외친적이 있습니다. “하나님 제발 그만하세요. 그만 하세요. 왜 이것을 그만두지 않습니까?”
우리의 아버지에 대하여 두 가지만 말씀드리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고비에서 고쳐져서 나오기까지 여러분을 깨어뜨리고 깨어뜨려지기 까지 여러분을 너무너무 사랑하십니다. 여러분이 필요한 만큼만 그 자리에 둡니다. 일이 끝나면 하나님이 그 자리에서 여러분을 옮기십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에게서 이제는 끝장이야라는 말을 듣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초월적인 삶이 여러분의 삶을 통하여 나타나기를 원하십니까? 그러나 여러분이 삶에 대하여 완전히 항복하는 지경까지 오셔야 합니다.







절대적 항복(롬12:1-2)

나는 완전히 하나님께 나는 다음의 권리들을 포기합니다.
항복했습니다.
나의 영 즐거운 환경을 가질 권리
나의 의지 받아들여질 권리
나의 마음 성공해야할 권리
나의 감정들 나의 소유물의 권리
나의 몸 나의 환경으로부터 구조받을 권리
나의 환경들 결과를 볼 권리
미래를 향한 나의 계획 하나님의 뜻을 알 권리
나의 가족 나의 환경을 이해할 권리
나의 꿈들과 희망들 바르게 증명되어질 권리
나의 과거의 성공들과 실패들 사랑받을 권리
나의 습관들 배우자와 자녀를 가질 권리
나의 문제들 하나님에 의해 쓰여질 권리
나의 관계들 내가 선택한 장소에서 살 권리
나의 재정 내가 원하는 직업을 가질 권리

<연구과제>
1. 욥의 문제들과 아시아에서의 바울의 고난들의 특징들을 되새겨 보십시오. 당신이
개인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위기의 4가지 특징을 그려보십시오.

2. 하나님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왜 고난을 허락하실까요? 당신이 부닥쳐왔던 문제들의
결과로서 당신은 어떠한 육신의 형태들을 생각합니까? 당신 자신의 육신은
근본적으로 긍정적입니까? 혹은 부정적입니까?

3. 당신 자신의 말로 깨어짐을 정의해 보십시오.

4. 하나님은 우리가 견딜 수 있는 것보다 더 무거운 짐을 지워주지 않으신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당신은 그에게 어떻게 대답하겠습니까? 당신은 그에게 어떤
성경구절을 제시하겠습니까?

5. 그 방법들 속에서 당신은 선악과의 지식의 나무 위에서 ‘좋은 가지’로 옮겨 보려고
시도해 보았습니까? 그 줄기를 타고 옮길 때 생기는 문제들은 무엇입니까?



제 3 과 완전히 새로운 나


깨어짐이라는 것은 어떤 조건입니다. 이것은 일회적인 것이 아니라 우리가 늘 갖고 있는 조건입니다. 우리가 완전히 하나님 앞에 의지하는 삶의 스타일입니다. 고난과 깨어짐을 같은 것으로 보지 마십시오, 고난은 깨어짐으로 이끌고 갈 수 있습니다. 고난을 당할 수는 있지만 깨어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깨어짐은 나의 삶에서 나의 손을 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내 삶을 통하여 하시고 자 하는 모든 것에 권리를 드리는 것입니다. 이런 수준에 오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분을 발견한 자신을 보게 될 것입니다.

1. 사람의 본성에 대하여 이야기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만드셨습니까?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로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흠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데살로니가전서5:23)

이 말씀을 보면 사람은 세 가지로 만들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경은 영과 혼과 몸으로 이루어졌음을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은 삼위일체입니다. 하나님 안에 3위가 있습니다. 3위일체의 하나님께서 만드신 모든 것은 3등분되어 있습니다. 이 세상을 어떻게 받아들이는가 하면 시간과 공간으로 받아들입니다. 시간은 과거, 현재, 미래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것들은 서로 다르지만 모여서 시간을 만들어냅니다. 공간도 높이, 넓이, 깊이로 되어있습니다. 이것은 같은 것은 아니지만 모여서 공간을 만들어 냅니다. 하나님은 자연을 만드실 때 3등분으로 만드셨습니다. *잘린 부분은 첨부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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