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성도들에게 쓰는 심장 안의 말

한국에 있는 성도들에게 드리는 앤드류 유 형제님의 편지


우리는 앞으로 새로운 관계, 형제와 형제들 사이에, 동역자와 동역자 사이에 새로운 관계가 필요합니다. 저는 이러한 교통을 통해 주님께서 길을 얻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기본적으로 주님은 한국에서 그분 자신의 일을 하셨습니다. 그것은 사람의 일이 아닌 성령이신 그분 자신의 놀라운 일입니다.


구원받은 사람의 인수, 형제자매들이 주님을 사랑하는 상태, 헌신하는 상태, 그리고 진리를 추구하는 상태를 볼 때, 그 모든 것이 사람들을 격려하며 성령께서 하신 일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형제자매들은 모두 오늘날 하나님께서 회복하신 흐름, 한 사역, 한 일, 한 몸, 사도들의 가르침, 또한 이 사역의 일 아래서 모두 그리스도의 몸이 함께 건축되기를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생양교건(生養敎建)을 하며 일 년에 일곱 차례 특별 집회 하는 이 모든 것이 사람들을 격려하여 주님의 몸이 격려받게 한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이러한 상태에 있을 때 우리는 대적이 하는 일을 미리 막아야 한다고 생각니다. 육체가 들어와 타고난 관념에 의해 주님의 일이 방해받거나 어려움을 지 않도록 막아야 합니다.


저는 며칠 전에 요한일서를 읽으면서 신성한 생명의 교통을 보았습니다. 요한일서는 먼저 우리에게 신성한 생명이 있음을 말하고, 이 신성한 생명에는 교통이 있음을 말합니다. 이 교통은 아버지와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의 교통입니다. 이 교통은 또한 사도들의 교통이며, 공통적이며 보편적인 교통으로서 어떤 차별 없는 교통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이고 하나님께 속해 있기만 한다면 우리는 사도들의 교통 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 교통은 우리를 함께 연결하고, 우리와 삼일 하나님, 즉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와 연결합니다. 그러나 그 교통을 실행하고 그 교통을 유지하려면 신성한 교통을 수행하는 조건이 필요합니다. 요한일서는 우리에게 신성한 교통에 대하여 말할 뿐만 아니라 신성한 교통의 조건을 알려 줍니다. 여러분이 개요를 읽어 본다면 신성한 교통을 유지하는 두 가지 조건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첫째, 우리가 우리의 죄를 시인하면 하나님은 신실하시고 의로우셔서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의 모든 불의함을 깨끗하게 하십니다. 그분은 또한 우리가 우리의 죄를 시인하면 우리는 빛 가운데 있게 되고, 반대로 우리가 죄가 없다고 하면 우리는 어둠 가운데 있게 되며 진리를 실행하지 않고 실재를 실행하지 않게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어둠 가운데 있을 때 하나님, 그리스도, 영, 교회가 실재가 되지 않고 실재가 되는 것이 한 가지도 없게 됩니다. 우리가 그러한 모든 것이 실재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한다면, 그것은 우리가 흑암 속에 살고 있음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생명의 교통 안에 머무르려면 먼저 빛 가운데 살면서 우리의 죄를 시인해야 합니다. 니 형제님은 흑암 가운데 사는 사람은 손가락이 다른 사람을 향하고, 빛 가운데 사는 사람은 손가락이 자신을 향한다고 말했습니다. 빛을 얻은 사람의 첫 번째 특징과 첫 번째 표현은 빛 가운데 엎드러지는 것입니다. 빛이 클수록 더 많이 엎드러지게 되며 생명의 성장도 더 빨라지게 됩니다. 영적 생명이 성장하는 근거는 우리가 빛을 얼마나 받았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과 사도들과 모든 믿는 이들과 교통을 유지해야 합니다. 이 교통은 혈액순환과 같아서 신성한 흐름인 한 흐름밖에 없습니다. 오늘날 온 땅에는 동양이든 서양이든 조직이 아닌 한 흐름 안에 있습니다. 이 형제님은 이 흐름을 보고 즉시 자신의 일을 내려놓으셨고 니 형제님과 연결되면서 이 흐름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그분은 사람을 따른 것이 아니라 이 흐름을 따르신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도 사람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이 흐름을 따릅니다. 이 흐름이 신성한 생명의 교통이며 사도들의 가르침입니다. 우리는 요즈음 사도들의 가르침을 중요하게 여기지만 우리에게 사도들의 가르침이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는 사도들의 교통 안에 살아야 합니다. 사도들의 가르침은 우리가 진리를 분명히 알게 하고, 사도들의 교통은 우리에게 생명의 섞임을 갖게 합니다. 그 교통은 소수 몇 명의 교통이 아니고, 어떤 사람들의 교통이 아니며, 우리와 뜻이 같고 마음이 맞는 사람과의 교통이 아니며, 우리와 배경이 같고 우리와 일치하는 사람과의 교통이 아니며,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과의 교통이 아닙니다. 미안합니다만 교통은 당신의 교통이 아니라 사도들의 교통입니다. 우리는 작은 서클들의 교통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우리는 몇 개의 서로 다른 교통을 가져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자녀이며 신성한 생명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사도들의 교통이라 불리는 하나의 공통된 교통 안에 있습니다. 이 교통은 개인의 이익이나 선호를 내려놓고 하나님의 뜻과 연결되어야 하며 삼일 하나님과 하나님의 경륜을 이루는 교통이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요한일서 1장 주석에서 교통이 무엇인지 해석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교통은 함께 나누고 함께 참여하는 것으로서 자신의 이익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많은 때 우리는 자신의 이익과 자신의 세력과 자신의 배경을 위해 무언가를 하는 것을 교통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자신의 이익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권익과 연결되어야 합니다. 요한일서와 계시록에 따르면, 하나님의 권익을 위해 첫째 중요한 항목은 우리가 신성한 교통 안에 살며, 신성한 출생으로 산출되는 신성한 사랑과 신성한 의를 살아 내어 죄와 세상과 마귀와 우상을 이기는 것입니다. 이것이 요한일서에서 우리에게 보여 주는 결과입니다. 즉, 우리는 자신이 거하는 지방에서 작은 교통의 단체를 세우지 않고 지방 교회를 세우게 됩니다. 지방 교회는 금등대로서 오늘날의 우주적인 몸의 표현이고, 후에는 새 예루살렘으로 최종 완결될 것입니다. 이것이 계시록이 우리에게 보여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권익은 그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자신의 이익을 내려놓고, 자신의 교통을 내려놓고, 자신의 작은 서클을 버리고, 사도들의 교통 안으로, 요한일서에서 계시하는 신성한 생명의 교통 안으로 들어가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그 교통 안에 있으려면 두 가지를 실행해야 합니다. 첫째, 죄를 자백하는 것입니다. 사람에게 자백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자백하는 것으로서 하나님의 빛 아래서 우리가 아님을 보고, 하나님과 우리가 얼마나 다른지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빛 가운데서 인정할 죄가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요한일서는 어떤 사람이 죄를 자백할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면 스스로 속이는 것이요, 진리가 그 안에 있지 않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의 빛 가운데 엎드려지기만 하면 하나님은 미쁘시고 의로우셔서 하나님의 아들의 보혈로 우리의 모든 죄를 씻으시고 우리의 모든 불의를 제거하십니다. 그 씻음이 우리를 신성한 교통 안으로 들어가도록 회복하시며, 우리로 다시 사도들과 삼일 하나님과 연결시킵니다. 한국의 많은 형제자매님들이 해외와 연결되고 동역자들과 연결되기를 바랍니다. 우리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사도들과 연결되고 사도들의 가르침과 연결되며 사도들의 교통에 연결되는 것입니다. 사도들의 교통에 연결됨을 통해 삼일 하나님과 연결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자신의 죄를 자백하지 않고 어둠 가운데 있다면, 입으로는 일년에 일곱 차례 집회를 따라가며 모든 지체들을 따른다고 말하지만 사실상 우리는 사도들의 교통 밖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날마다 신성한 교통의 순환 안에 있으려면 첫째 죄를 자백해야 합니다. 우리가 신성한 생명의 교통 안에 머무르는 둘째 조건은 형제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형제를 사랑하지 않으면 여전히 어둠 가운데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형제는 어떤 종류의 간판을 가진 형제가 아닙니다. 오히려 요한일서에서는 하나님에게서 태어난 사람이 형제라는 것입니다. 그가 형제이기만 하면, 그가 절대적이든 그렇지 않든 부드럽든 강하든 어떤 상태이든 주님은 우리가 그 형제를 사랑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은 절대적인 형제, 잘 따르는 형제, 지혜로운 형제, 영적인 형제를 사랑하라고 하시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우리를 낳으신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우리를 낳으신 하나님은 오직 한 분이십니다. 다른 선택이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를 낳으신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에게서 난 사람들을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를 낳으신 하나님이 한 분이시고 하나님에게서 난 사람도 오직 한 종류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종종 하나님께서 낳으신 사람들을 여러 부류로 나누고 어떤 사람과는 교통할 수 있지만 어떤 사람과는 교통할 수 없다고 합니다. 우리에게 그러한 상태가 있다면 형제 사랑을 실천하지 않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우리가 사도들의 교통 안에 머물러 있으려면 그 두 가지, 곧 죄를 자백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며 형제를 사랑하는 것을 반드시 실천해야 합니다. 형제를 사랑하는 사람은 빛 가운데 살며 넘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빛 가운데 있다 하면서 형제를 미워하는 사람은 여전히 어둠 안에 있는 것입니다. 어둠이 그의 눈을 멀게 했기 때문에 그는 어둠 가운데서 행하면서 어디로 가는지 모릅니다. 우리가 빛 가운데 사는가는 죄를 자백했는지, 형제를 미워하는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우리 마음 안에 형제에 대하여 어떤 미움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가 어둠 가운데 살고 있음을 의미하며 사도들의 교통 안에 살지 않고 삼일 하나님의 교통 안에 살지 않음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과거 몇 개월 전에 저는 몇 부류의 형제들의 많은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각 부류마다 그들의 이유와 역사와 변호가 있었습니다. 우리가 그러한 역사나 이유나 변호 안에 머물러 있다면 우리는 하나 안으로 이끌리기가 아주 어려울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장 아무개 형제 무리와 양 아무개 형제 무리가 하나 되는 것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또한 양 아무개의 형제들과 박 아무개의 형제들이 하나 되는 것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자신을 내려놓고 다른 사람의 견해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자신의 견해를 내려놓고 사도들의 교통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내가 당신과 타협하고, 당신이 나와 타협하는 것이 아닙니다. 당신과 나를 다 내려놓고 주님의 빛 안으로 들어가 빛 가운데서 사도들의 교통 안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 자신의 이유와 역사를 내려놓는다면 요한일서에서 말하는 것을 실행할 것입니다. 개인의 이익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권익과 연결되는 것이 교통의 의미입니다. 당신이 교통 안에 들어가려면 내려놓는 것이 있어야 합니다. 당신이 내려놓으려 하지 않고 자신의 유익을 구한다면 하나님의 권익과 연결될 길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권익은 우리로 신성한 출생에 의해 신성한 사랑과 의를 살아내며 죄와 세상과 마귀와 우상을 이기고 금등대인 지방 교회의 간증이 되게 할 것이고 최종적으로 새 예루살렘으로 완결되게 할 것입니다. 그것이 신성한 교통이며, 우리를 체험 안으로 이끌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어 우리가 자신의 일과 자신의 이익을 구하는 데서 구원하사 하나님의 권익과 하나님의 일과 연결되게 하시고 하나님의 영원한 경륜을 성취하게 하시기를 구합니다. 우리는 오늘날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위임을 실행하여 교회의 간증이 되어야 합니다. 더 나아가 우리는 오늘날 사역의 부담을 가지고 활력 그룹을 실행하여 유기적으로 그리스도의 몸을 건축해야 합니다. 우리는 반드시 새사람 안에서 하나님께서 갈망하시는 그러한 표현을 실행해야 합니다.


최근 홍콩 교회는 활력 그룹 훈련을 하여 다시 한번 이 형제님의 메시지 안으로 들어가고 있습니다. 어제 저녁에 우리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길에 대하여 교통하였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마음으로 사람들을 목양하고 소중히 품어야 합니다. 교회 생활은 왕국 생활이며, 왕국 생활에는 높은 요구가 있으며 그 요구는 아주 엄격합니다. 신약 성경에서 교회 생활은 왕국 생활이라고 한 곳이 두 군데 있습니다. 마태복음 16장은 왕국을 계시하고, 마태복음 17장은 왕국의 축소판을 보여 주며, 마태복음 18장은 왕국의 실행을 말하고 있습니다. 왕국의 실행이 오늘날의 교회 생활입니다. 교회 생활 안에는 형제에게 요구하는 것이 없고 형제를 용서하는 것만 있습니다. 마태복음 18장 전체는 용서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어린아이라도 당신이 실족하게 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분은 당신이 작은 자들 중 하나를 실족하게 했다면 당신의 온 몸이 연루되지 않도록 실족하게 한 지체를 찍어 버려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이전에 우리가 마태복음 18장을 읽을 때에는 찍어 버려야 할 지체가 연약한 지체, 어린아이, 우리를 귀찮게 하는 지체, 우리로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지체, 일을 시원하게 처리하지 못하는 지체들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사실 찍어 버려야 할 지체는 일을 시원하게 처리하지 못하는 지체가 아니라 일을 시원하게 처리하지 못한다고 정죄하는 지체들, 다른 지체를 정죄하는 지체입니다. 여기에서 우리의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작은 자들 중에 한 사람도 잃어버리기를 원하시지 않는 것을 분명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하나님께서 정하신 길을 실행하고, 생양교건을 실행하고 주님의 회복 안에서 지방 교회를 실행하는 데 이러한 영이 있습니까? 형제를 받아들이고, 형제를 용서합니까? 다음 말씀은 여러분이 잘 알고 있습니다. 어떤 형제가 당신에게 죄를 지으면 공개적으로 그의 잘못을 말하지 말고 그가 혼자 있을 때 가서 말하라고 합니다. 그 형제가 무슨 말을 했고 나에게 어떻게 죄를 지었는지 이것저것을 전하지 말아야 합니다. 말은 전할수록 부풀려지고 심각해지면서 참인지 거짓인지도 모르게 됩니다. 여기에서 당신의 형제가 당신에게 잘못을 했으면 그가 혼자 있을 때 가서 그와 이야기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어떤 형제가 우리에게 어려움이 되면 개인적으로 그에게 가서 말해야 합니다. 소문은 빨리 퍼지고 부풀려져서 형제를 돕는 것이 더 어렵게 됩니다. 여기에서 개인적으로 그에게 가서 그와 이야기하고, 그가 듣지 않으면 한두 사람을 데리고 같이 가서 그와 이야기하고, 그래도 듣지 않으면 교회에 알리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으면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고 말합니다. 이전에 우리가 이 말씀을 형제를 제명하는 근거로 삼았습니다. 어떤 형제에게 문제가 있으면 먼저 그에게 권면하고, 그가 듣지 않으면 교회에 알리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으면 그와의 관계를 끊고 그를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겼습니다. 그러나 마태복음 18장에서는 죄를 지은 형제가 교회의 말도 듣지 않았지만 그를 버리지 않았습니다. 그다음 구절은 당신이 그 형제를 위해 기도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두세 사람이 합심하여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고 땅에서 묶으면 하늘에서도 묶입니다. 그 두세 사람은 죄를 지은 형제에게 권면하던 그 형제들입니다. 그들이 권면하였으나 그 형제가 듣지 않았을 때 그들은 어떻게 했습니까? 집에 가서 그 형제를 정죄하며 제명할 것을 중얼거렸습니까? 아닙니다. 그들은 집에 돌아가서 그 형제를 위해 동심합의로 기도하였습니다. 그다음 구절은 이어서 천국의 왕에게 노예가 있는데, 그 노예가 그에게 많은 돈을 빚졌으나 주인은 그를 용서해 주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 노예는 한 동료 노예가 자신에게 빚진 것을 용서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주인은 노하여 빚진 것을 다 갚을 때까지 그를 형벌을 관장하는 사람들에게 넘겼습니다. 이 말씀은 교회가 권면하여도 듣지 않은 자에게 하는 말씀입니다. 베드로는 그런 사람을 몇 번이나 용서해야 하는가, 일곱 번이면 충분한가를 주님께 여쭈었습니다. 그 사람은 한 번 문제를 일으키고 권면을 해도 듣지 않고, 두 번째, 세 번째 문제를 일으키고도 듣지 않아서 다시 찾아가 그를 도우려 해도 듣지 않고 날이 갈수록 심각해지면 어떻게 합니까? 베드로가 “일곱 번이면 충분합니까? 일곱 번 용서한 후에 관계를 끊어도 됩니까?”라고 여쭈었을 때, 예수님은 끊을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일곱 번씩 일흔 번까지 용서해도 여전히 끊을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그를 끊어 버린다면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당신과의 관계를 끊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천부께서 당신을 용서하신 만큼 당신도 용서하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교회 생활은 왕국 생활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왕국 생활은 요구가 엄격하여 나는 당신에게 요구하고 당신은 나에게 요구하면서 거기에 미치지 못하면 나가야 하고, 죄를 지었으면 나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의 마태복음에서 말하는 왕국 생활은 용서하는 생활입니다. 왕국은 용서가 가득합니다. 마태복음 말씀은 우리의 관념을 전환시킵니다.


여러분 마태복음 5장부터 7장까지의 왕국 헌법을 읽고 왕국 헌법 매우 엄격하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의롭지 못하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으니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 좁은 길을 걷는 것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맞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러나 마태복음 5장부터 7장까지는 우리에게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용서하시는 것과 같이 우리도 용서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여러분이 다른 사람을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도 당신을 용서하지 않으십니다. 마태복음 5장 45절과 46절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해를 악한 사람과 선한 사람 위에 떠오르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사람과 불의한 사람에게 내리신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어서 48절 그러므로 여러분의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온전하신 것같이, 여러분도 온전하게 되라고 말합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어떻게 온전하셨습니까? 용서하시는 데 있어서 온전하셨습니다. 악한 사람과 선한 사람을 사랑하고 의로운 사람과 불의한 사람을 받아들이는 데 온전하십니다. 주님은 마태복음 5장부터 7장까지에서 우리가 다른 사람의 빚을 제하여 주는 것과 같이 우리의 빚을 제하여 라고 기도하라고 가르치십니다. 왕국 생활은 용서하는 생활입니다. 오늘날의 교회는 왕국의 실재이고, 오는 시대에 왕국이 실현될 것입니다. 오늘날 왕국의 실재 안에서 우리는 은혜로 형제를 대해야 합니다. 오는 왕국의 실현 안에서는 하나님께서 의로 우리를 대하실 것입니다. 성경요도 60항목 가운데 첫 번째 언급 것이 용서입니다. 용서에서 첫 항목은 왕국의 용서를 언급합니다. 우리는 이전에 왕국의 용서를 읽었습니다. 그곳에서의 용서는 의를 따른 것으로서, 한 푼이라도 갚지 못하면 그곳에서 나올 수 없는 용서입니다. 그러나 거기에서 말하는 왕국은 왕국의 실현인 천년왕국이 실현된 때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때 그 왕국의 용서는 의를 따라 한 푼 한 푼 분명하게 계산 것입니다. 율법에 따라 한 푼이라도 분명하게 계산하지 못하면 나올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의 교회 생활은 왕국의 실현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왕국의 실재 안에 있습니다. 왕국의 실재 안에서 우리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우리를 용서하신 것같이 다른 사람을 용서해야 합니다. 교회 생활 안에는 용서가 충만합니다. 용서가 없으면 교회 생활이 없으며 오늘날의 왕국 생활이 없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이 시대에서 용서하지 않으면 오는 시대에 의로운 용서를 거쳐야 할 것이라고 엄중하게 말씀하십니다. 의로운 용서는 당신이 형벌을 관장하는 사람에게 넘겨진다는 것입니다. 34절 주인이 크게 노하여 그를 형벌을 관장하는 사람에게 넘긴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천년왕국 시대에 그가 빚진 것을 모두 다 갚을 때까지 그렇게 한다는 것입니다. 한 푼이라도 다 갚지 않으면 그는 나올 수 없습니다. 우리가 오늘 우리의 형제를 용서하지 않는다면, 장래에 우리는 왕국에서 한 푼이라도 전히 다 갚아야 나올 수 있습니다. 이것이 마태복음 18장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입니다.


주님께서 오늘날 우리에게 주신 길은 사람을 단절시키거나 제명하거나 이방인과 세리같이 여기는 것이 아닙니다. 죄를 지은 형제에 대하여 교회도 어쩔 수 없는 상태에 이르더라도 여전히 일곱 번씩 일흔 번 용서해야 하고, 여전히 그가 해방되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한 영이 왕국의 영이고, 그러한 영이 생양교건하며 활력 그룹을 실행하는 영입니다. 활력 그룹은 오늘날 왕국 생활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진정으로 교회 생활을 실행하는가는 우리가 형제를 용서하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몇 번 용서합니까? 일곱 번씩 일흔 번입니다. 즉 무한량하게 용서하는 것입니다. 18장 마지막 절에서 “너희가 각각 중심에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에서 용서는 마음에서부터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때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입으로는 “화해합시다.”라고 말하면서 마음으로는 화해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우리가 형제를 마음에서부터 용서하라고 말합니다. 이 형제님은 한 예를 드셨습니다. 어떤 사람이 형제를 용서한다고 말하고 돌아서서는 “형제님, 잊지 마세요. 제가 형제님을 용서해 준 것을!”라고 말한다면 그는 용서하였지만 잊어버리지는 않은 것입니다. 그는 마음에서 그 일을 내려놓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은 이러한 사람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형제님은 죽은 개를 눈이 쌓인 땅속에 묻었지만 개꼬리는 매장되지 않고 여전히 눈 위에 나와 있군요.” 용서한 형제를 만날 때마다 그는 꼬리를 가지고 냄새를 맡습니다. “보십시오, 형제님, 내가 당신을 용서했습니다!” 이러한 용서는 마음에서 한 용서가 아닙니다. 마태복음 18장 35절은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라고 말합니다. 천부께서는 우리를 겉으로만 용서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분은 중심, 즉 마음에서 우리를 용서하셨습니다.

교회 생활이 왕국 생활의 둘째 단계라는 것을 말하는 곳은 바로 로마서 14장입니다. 로마서 14장 17절은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나라는 교회입니다. 오늘날의 교회 생활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17절은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말하는 교회를 언급할 때 우리는 대개 이 구절을 사용니다. 그러나 이 단락의 문맥은 모두 우리가 형제를 받아들이는 것에 대해 말합니다. 형제를 받아들이는 것! “믿음이 연약한 자를 너희가 받되 … 비판하지 말라.” 믿음이 약한 형제 어떤 일을 할 담력이 없다고 그를 경시하거나 멸시하지 마십시오. 형제 과거에 연약하고 타협했던 형제라는 이유로 그 형제를 경시하거나 멸시하지 말아야 합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믿음이 연약한 사람을 비판하지 말고 받으라고 말합니다. 이 사람어느 정도로 믿음이 연약해졌는에 대해 성경은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주님의 이름을 부인할 정도로 연약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가 주의 이름을 부인한 후에 내일 다시 주님의 품으로 돌아올 수도 있습니다. 믿음이 연약한 이 형제를 여러분은 받아들이겠습니까? 성경은 분명하게 “믿음이 연약한 자를 너희가 받되 … 이는 하나님이 저를 받으셨음이니라.”라고 말합니다. 그의 믿음이 연약한 것은 사실이지만 하나님께서 이미 그를 받아들이셨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따라 형제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로마서 라이프 스타디〉는 우리에게 로마서가 네 단락으로 나뉜다는 것을 알려 줍니다. 첫째는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이요, 둘째는 거룩하게 됨이며, 셋째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의롭다 함은 우리를 거룩하게 됨으로 이끌고, 거룩하게 됨은 우리를 그리스도의 몸 안으로 이끕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몸은 여기서 마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몸은 넷째 단계인 교회 생활의 실행, 즉 지방 교회로 우리를 이끕니다. 지방 교회는 교회 생활을 실행하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몸의 실재와 실행입니다. 교회 생활을 실행하는 면에서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한 가지는 바로 형제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믿음이 연약한 사람까지도 우리는 받아들여야 합니다. 받아들이지 않으면 결코 지방 교회의 간증을 실행할 생각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절대적으로 주님을 따릅니다.”라고 말하면서 절대적이지 않다고 여겨지는 사람들을 배제한다면 여러분은 지방 교회의 간증을 실행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외에 만일 여러분이 자신은 어리석지 않고 어떻게 정부와 왕래해야 할지 아는 지혜로운 사람이니까 자신을 따르라고 한다 하자. 여러분은 그르고 내가 옳으니 나를 따르라고 말하는 고자세를 취한다면 여러분은 결코 참되게 교회 생활을 실행할 수 없습니다. 혹은 여러분이 자신이 외적으로 외치는 것만 주의하지 않고 일만 주의하지 않고 영적인 길을 가며 순종하며 생명을 따르기 때문에 일을 중시하는 사람들은 정죄되어야 한다고 합시다. 이렇게 정죄할 때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몸을 파괴하게 됩니다. 우리는 사람들에게 라벨을 붙이기를 좋아하지만 사역의 말씀은 사람들에게 라벨을 붙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에게 라벨을 붙일 때 여러분은 지방 교회의 간증을 실행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자신을 지방 교회라고 하면서 절대적이지 않은 사람을 받아들이지 않고 영적이지 않은 사람도 받아들이지 않으며 지혜롭지 않은 사람도 받아들지 않는다면, 자기 식구들도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어떻게 우리가 지방 교회의 간증을 가졌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어떤 이는 이날을 저날보다 더 귀히 여기고 어떤 이는 모든 날을 똑같이 여깁니다. 이날을 저날보다 더 귀히 여기는 사람은 그것을 고집할 것입니다. 어제 저녁에 우리는 우리의 애호를 가지고 있고, 우리의 선호는 우리의 표준이 된다고 말했습니다. 결국 우리의 표준은 우리의 요구가 되고, 우리의 요구는 우리의 정죄가 되며, 우리의 정죄는 남을 쫓아내게 됩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선호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사역을 따르려면 절대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선호가 우리의 표준이 되고 우리의 표준은 상대방에 대한 요구로 변합니다. 요구가 있으면 곧 남을 정죄하게 됩니다. 또 상대방이 당신을 따라 가지 않으면 쫓아내려고 합니다. 다시 말해서 당신은 다른 이가 당신의 말을 듣도록 요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요구에 응하지 않으면 정죄하는 것이 우리입니다. 요구를 듣지 않으면 정죄하고 정죄하여도 듣지 않으면 당신의 말을 듣지 않은 그 사람을 쫓아냅니다. 정부와 타협하지 않겠다는 당신의 요구가 하나의 표준일 수도 있습니다. 이것들은 우리가 교회 생활을 하는 데 장애가 됩니다. 이것이 로마서 14장에서 말한 형제 앞에 넘어지게 하는 돌을 두는 것입니다. 거기에서는 우리에게 서로 비판하지 말라고 권합니다. 형제를 넘어지게 하는 돌이나 사물을 두지 말라고 합니다. 우리가 서로 비판하는 것은 상대방 앞에 돌을 두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남에게 더 절대적일 것을 요구하거나 당신의 말을 듣도록 요구하게 되고 혹은 당신에게 더 협력하도록 요구하게 됩니다.


많은 때 우리는 로마서 14장 17절을 사용하여 다른 이를 공격합니다. 다른 이가 먹고 마시며 노는 것을 보면 “형제님, 하나님의 나라는 먹고 마시는 것에 있지 않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이러한 말로 그 형제를 정죄하는 것입니다. 사실 바울의 말은 바로 당신에게 한 말입니다. 그는 “형제여, 하나님의 나라는 먹느냐 안 먹느냐, 마시느냐 안 마시느냐에 있지 않습니다. 당신이 먹지 않고 마시지 않는다고 해서 그것이 곧 하나님의 나라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나라는 먹지 않고 마시지 않는 것에 있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무엇에 달려 있습니까? 의와 화평과 성령 안의 희락에 있습니다. 그는 어떤 이는 모든 것을 먹을 수 있는 것으로 여기지만 연약한 사람은 채소만 먹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마 당신은 교회 안에 어떻게 연약한 사람이 있을 수 있느냐고 물을 것입니다. 로마서는 계속 하나님의 아들의 형상과 같은 형상을 이루는 것을 말하기 때문에 이 책은 매우 높은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교회 생활을 실행하는 것으로 가져오면 모든 이가 하나님의 아들의 형상을 갖지 않았다는 것을 발견할 것입니다. 연약한 사람도 있고 채소만 먹는 사람도 있습니다. 로마서는 “먹는 자는 먹지 않는 자를 업신여기지 말고”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형제를 업신여기지는 않았습니까? 먹지 않은 사람은 먹는 사람은 비판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형제를 비판하지는 않았습니까? 형제를 업신여기고 비판하는 것은 형제를 받아들이는 것과 상반됩니다. 먹는 사람은 먹지 않은 사람을 업신여겨서는 안 됩니다. 먹지 않은 사람도 먹는 사람을 비평하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를 받아들이셨기 때문입니다.


그다음에 바울은 매우 강하게 말합니다. “남의 하인을 판단하는 너는 누구뇨?” 하나님의 집에서 당신은 몇 째가 됩니까? 왜 당신이 남의 하인을 판단합니까? “그 섰는 것이나 넘어지는 것이 제 주인에게 있으매 저가 세움을 받으리니 이는 저를 세우시는 권능이 주께 있음이니라.” 그다음 구절은 “혹은 이날을 저날보다 낫게 여기고 혹은 모든 날을 같게 여기나니 각각 자기 마음에 확정할지니라.”라고 말합니다. 교회를 정부에 등록하자는 사람으로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하고, 등록하지 말자는 사람으로 인하여도 하나님께 감사드려야 합니다. 우리의 이해에 따르면, 오늘날 우리는 특별한 날을 지킬 필요가 없지만 날을 지키는 사람으로 인하여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드려야 합니다. 신약에서 날을 지키라고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가 날을 지키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날을 지킨다면 여전히 그로 인해 하나님께 감사드려야 합니다. 여러분에게 이러한 분량이 있습니까?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우리는 우리의 개척을 위해 사는 사람이 아니요, 우리의 권위와 지위를 위해 사는 사람도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가 가는 길을 위해 사는 것이 아니요 우리가 취하는 방법을 위해 사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방법을 위해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모두 주님을 위해, 주님의 몸과 주님의 간증을 위해 삽니다. 우리가 다른 의견과 방법을 가진 형제들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주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넓혀 주시기 바랍니다. 만일 우리가 이것을 실행할 수 없다면 우리는 우리를 지방 교회라고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지방 교회가 될 자격이 없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지방 교회라면 최소한 하나님이 받아들이신 사람들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받아들이신 사람들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당신은 지방 교회라는 간판을 내려야 합니다. 만일 여러분이 자신을 지방 교회라고 칭한다면 최소한 여러분의 형제를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지방 교회이면서 어떤 점을 강조한다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면 지방 교회이면서 다른 것을 중요시하는 또 다른 사람들이 나올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어떤 종류의 지방 교회입니까? 지방 교회란 한 지방에서 무엇을 하든지 한 간증을 지키는 것입니다. 로마서 14장 3절에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받아들이신 것처럼 받아들일 수 있도록 주님께서 우리에게 형제를 받아들이는 영을 주시기 바랍니다. 그런 다음, 로마서 15장 7절에 따라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들이신 것처럼 서로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들이신 것은 우리의 선함 때문이 아니라 그분께서 우리를 받아들이는 영을 가지셨기 때문입니다. 빌립보서 1장 8절은 바울이 그리스도의심장, 즉 그리스도의 느낌으로 빌립보인들을 생각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이 단어 사복음서에서는 불쌍히 여김으로 번역되었습니다. 주 예수님은 어떤 행동을 취하실 때 항상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지셨습니다. 마태복음 9장에서 주님은 사람들이 목자 없는 양 같음을 보고 그들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그런 다음 그분은 열두 제자를 보내어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들을 찾으셨습니다. 14장에서 그분은 오천 명에게 먹을 것이 없음을 보고 그들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15장에서 사천 명에게 먹을 것이 없음을 보고 그들을 불쌍히 기셨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마음에 근거하여 사람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은 주님의 마음과 같아야 합니다. 주님의 마음은 사람들을 목자 없는 양으로 보는 마음입니다. 누가복음 10장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는 길에서 강도 만난 사람이 있습니다. 레위인이 지나갔지만 그를 불쌍히 여기지 않았고, 바리새인들도 지나갔지만 그를 불쌍히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선한 사마리아인은 지나가다가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겼습니다. 누가복음 15장에서탕자가 집에 돌아왔을 때 아버지는 멀리서 보고는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졌습니다. 이 모든 사례에 사용 ‘불쌍히 여김’은 다 같은 단어입니다. 다른 이를 받아들이는 일에서 주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만지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마음이 주님의 마음같이 큰마음이 되기를 바랍니다. 형제를 받아들임에 있어서 우리 주 예수님보다 좁아서는 안 되고, 우리의 마음이 주님의 마음보다 좁아서도 안 됩니다. 우리는 우리와 의견 다른 사람들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빌립보서 1장 8절에서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의 심장으로 빌립보 성도들을 그리워한다고 말했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주님의 마음에 들어간다면 성도들을 그리워할 것이지만 그렇지 않으면 여러분은 성도들을 거절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은 어떤 마음입니까? 그분은 긍휼히 여기는 심장을 가지셨습니다. 누가복음 1장 78절과 79절은 하나님의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말합니다. 그분은 흑암사망의 그늘에 앉아 있는 사람들에게 빛을 비추어 우리 발을 평의 길로 인도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은 회복하는 마음입니다. 즉 다른 이를 받아들이고 포용하며 불쌍히 여기는 마음입니다. 로마서 14장은 성경 전권에서 서로 받아들이는 것에 대해 가장 분명하게 말한 곳입니다. 우리가 떼는 떡은 우리가 모든 하나님의 자녀를 받아들인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참으로 그렇게 하고 있습니까? 그렇지 않다면 우리의 간증은 참된 간증이 아닙니다. 성경에서 ‘받아들이는 것’은 ‘붙들다’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것을 말씀하셨을 때 베드로는 그분을 ‘붙들고’ “주 예수여, 십자가에 오르지 마소서.”라고 했습니다. 그 ‘붙들음’이 바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즉, 우리와 의견이 다른 사람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들을 붙들 정도를 받아들입니까? 때로 우리는 사람들에게 “좋습니다. 우리가 받아들이겠습니다. 집회에 오시되 맨 뒤에 앉으십시오.”라고 말합니다. 그 사람을 좇아내지는 않지만 그를 상관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받아들임은 형제가 와서 맨 뒤에 앉아 있을 때 달려가 그를 ‘붙들어’ 주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주 예수님을 못 가게 한 것처럼 그가 가려고 할 때 못 가게 하는 것입니다. 형제를 받아들이는 것은 소극적으로 반대하지 않고 쫓아내지 않는 것일 뿐 아니라, 그 형제에게 달려가서 “형제님, 가지 마십시오! 제가 붙들어 드리겠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17장에서 유대인들이 장터에 있는 불량배들을 데리고 와서 무리를 이루어 바울을 반대하였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무리를 이루어’라는 말이 바로 받아들임의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형제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단지 오는 사람을 거절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라 더욱이 그들을 모으는 것입니다.


여러분 세 무리는 서로 받아들이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단지 당신이 우리 집회에 오는 것을 우리가 반대하지 않고, 우리가 집회에 오는 것을 당신들이 반대하지 않는다는 뜻이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형제를 받아들이는 것은 형제를 한곳에 모으고 그를 붙들어 주는 것을 포함합니다. 형제를 받아들이는 것은 브리스라와 아굴라가 바울을 보고 집에 영접한다는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그들은 “바울 형제님, 당신을 거절하지 않 받아들이겠습니다!”라는 방식으로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은 바울을 집에 영접했습니다. 우리와 견해가 다른 사람들을 받아들이되, 그들을 붙들고 모으며 그들을 집에 영접할 정도로 받아들일 수 없습니까? 이것이 표준적인 받아들임입니다. 이 표준에 이르지 못하면 성경에서 말한 받아들임의 표준에 이르지 못한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성경은 우리에게 형제를 위해 목숨을 버려야 할 것을 말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어 우리를 위해 목숨을 버리셨기 때문에 우리도 형제를 위해 목숨을 버려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인하여 서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주 예수님이 팔리시던 그날 밤에 그분은 제자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그분이 어떻게 하셨습니까? 그분은 그들을 위해 발을 씻어 주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서로 받아들이려면 서로의 발을 씻어 주어야 합니다. 서로 발을 씻어 주려면 우리의 겉옷, 즉 우리의 선입견과 견해를 벗어야 합니다. 〈요한복음 라이프 스타디〉를 읽어 보시면 겉옷을 벗는 것이 우리의 선입견, 우리가 한 일, 우리의 됨됨이를 내려놓는 것임을 알게 됩니다. 그런 다음 요한복음 13장 35절은 우리가 이렇게 자신을 내려놓고 서로의 발을 씻어 준다면 모든 이가 우리가 주님의 제자인 줄 알게 된다고 말합니다. 오늘 한국에서 우리가 모두 사역을 따른다고 말합니다. 모두가 주님의 사역을 따르는데 사람들이 어떻게 우리가 누구인지 알겠습니까? 우리가 외친다고 사람들이 알겠습니까?  성경은 우리에게 서로 발을 씻어 주라고 말합니다. 그럴 때 사람들은 우리가 주님의 제자인 줄 안다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자신의 겉옷, 즉 우리의 견해를 내려놓고 허리를 동여서 제한 아래 자신을 두고 자유를 버리고 서로를 유쾌하게 하며 상호 교통 안으로 회복되고 생명의 교통 안으로 회복된다면 모든 사람이 우리가 주님의 제자임을 알게 됩니다.


나는  ○○ 지방이 사분오열되었기 때문에 2세들이 우리 가운데 오기 싫고 교파로 가겠다는 말을 들었을 때 마음이 매우 아팠습니다. 우리의 2세조차도 우리가 주님의 제자인 줄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또한 우리 가운데 오려고 하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형제들이여, 우리 자신과 2세들을 위해 서로 발을 씻어 주면 어떻겠습니까? 이 발 씻음은 우리의 교통을 가로막는 과거의 모든 파일을 삭제하는 것입니다. 고대에 유대인들은 길을 가다 보면 먼지로 인해 발이 쉽게 더러워졌습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와서 음식을 먹을 때, 발을 뻗으면 먼지와 냄새로 인해 유쾌하지 않게 되고 교통이 방해받았을 것입니다. 주님의 길을 가다 보면 우리도 모르게 역사가 생기고 원망이 생기고 옳고 그른 것이 쌓이게 됩니다. 이것들이 일단 들어오면 우리의 교통은 끊어지거나  유쾌하지 않게 됩니다. 교통 안에 악취가 나는 것과 같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는 남에게 요구해서는 안 됩니다. 주 예수님의 본을 따라 우리의 겉옷을 벗어 버리고 허리에 수건을 두르고 다른 사람의 발을 씻어 주어야 합니다. 주 예수님은 우리의 선생으로서 이렇게 하심으로 우리에게 그렇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만일 우리가 이렇게 한다면 다른 이는 유쾌하게 될 것입니다. 당신이 능동적으로 오염, 즉 역사와 옳고 그름과 정죄를 제한다면 교통은 회복될 것입니다. 이러한 말씀이 바로 사랑을 실행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할 때 사람들은 우리가 주님의 제자인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지방에 있든지 우리의 이웃과 정부가 우리가 주님의 참된 제자인 것을 볼 수 있도록 주님께서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기 바랍니다.


요한일서 5장 1절은 우리에게 “하나님께로서 난 자니 또한 내신 이를 사랑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자를 사랑하느니라”라고 말합니다. 우리를 낳으신 분은 한 분밖에 없기 때문에 우리는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에게서 난 사람들도 한 무리밖에 없고 그들에 대해 우리는 선택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그분에게서 난 한 무리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 다음 4장 17절은 우리에게 “이로써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룬 것은 우리로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 함이니 주의 어떠하심과 같이 우리도 세상에서 그러하니라.”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모두 주님의 심판대, 즉 최후의 법정을 거쳐야 합니다.


우리 안에서 사랑이 온전해질 필요가 있습니다. 즉, 사랑에 있어서 우리는 온전케 될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새 길을 가는 데 있어서 훈련을 받고, 고봉의 진리에 있어서 훈련을 받아야 할 뿐 아니라 또한 사랑 안에서 온전케 될 필요가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온전케 된다면 심판 날에 우리는 담대함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분이 어떠하듯이 이 땅에 사는 동안 우리도 그러해야 합니다. 그분께서 우리를 받아들이신 것처럼 우리도 서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분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도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그분께서 우리를 먹이신 것처럼 우리도 서로를 먹여야 합니다. 그분께서 기뻐하신 것을 우리도 기뻐해야 합니다. 우리가 왕국과 교회 생활과 활력 그룹을 새로운 관계 안에서 말씀과 길을 갖도록 주님께서 우리를 도우시기 바랍니다. 활력 그룹을 하려면 서로 죄를 자백해야 합니다. 활력 그룹을 실행하는 첫째 조건은 바로 많고도 철저한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서로 죄를 자백하기 바랍니다. 이것이 바로 활력 그룹을 실행하는 것이요 교회 생활을 실행하는 것이며 왕국을 실행하여 서로 받아들이고 용서하며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서로 받아들이고 용서하며 서로 사랑하는 새사람의 생활 안에서는 유대인이나 스구디아인이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다 받아들이셨기 때문에 새사람 안에는 유대인도 없고 스구디아인도 없으며, 종도 없고 자유인도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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