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경륜의 적용(11)-생명과 빛과 하나되라

제가 1983년도에 회복되어 교회생활을 하던 중 그 당시 가장 신선했던 
충격은 성경의 이야기가 바로 우리의 이야기임을 보았을 때였습니다. 

예전에는 사도 바울, 베드로, 요한 그러면 감히 ‘오르지 못할 나무’ 처럼 
보였습니다. 그들은 대 사도이고 또 성경도 쓴 분들이고 난…. 
그러나 어느 날 보니 그들이나 저나 다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들이었습니다. 
다 형제들이고, 그들에게도 허물과 약함이 있고, 내게도 주님이 각 사람에게 
주신 은혜의 분깃이 있습니다. 분량과 은사만 사람마다 조금씩 다를 뿐입니다. 
그러므로 ‘바울 형제가…’ 이렇게 말할 때 얼마나 사도 바울이 친근하고 
가깝게 느껴지는지 모릅니다. 

또 한 가지 깊은 인상은 성경은 삼국유사나 삼국지 같은 흘러간 옛 이야기가 
아니라 반드시 ‘이뤄져야 하고 현재에도 적용되어야 하는 살아있는 기록’ 
이라는 것입니다. 저는 이런 인식 이후 ‘주여 이 말씀을 우리 중에서 이루소서!’ 
‘오 주님 나로 이 말씀의 실재 안으로 이끌어 주소서!’ 라는 기도를 하게 
됩니다. 

마가복음 4장을 이런 관점에서 읽어 갈 때 다음 네 가지 비유(parables)에 
대해서도 깊은 이해가 있게 되었습니다. 

즉 4장 2-20의 씨뿌리는 비유, 26-29의 씨를 땅에 심는 이야기는 유사하며 
동일하게 생명이 있는 씨(생명)에 관한 이야기였습니다. 
반면에 4장21-25는 등불 즉 빛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나머지 겨자씨 한 알에 대한 비유가 있지만 이 비유는 ‘공중의 새들’을 
앞의 4절과 15절(사단)에 근거하여 해석한다면, 그리 적극적인 면을 말하는 
것으로 볼수 없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마가복음 4장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왕국은 결국 
적극적인 면으로만 볼 때 생명과 빛의 왕국입니다. 하나님의 경륜은 바로 이러한 
왕국을 이 땅 위에서 성취하기 위한 것입니다. 

1. 생명 

예전에 저는 악을 미워하고 선을 추구하던 사람이었습니다. 물론 여기서 
선이란 사람을 좋은 의도로 선대하는, 그러나 여전히 타락한 옛사람 안에서 
나온 그런 선입니다. 

말을 못하는 사람에게 수화를 배워서 자원봉사를 하려고 그 바쁜 대학 4학년 
무렵 순복음교회 국제선교센타에 일주일에 한 번씩 수화를 배우려 다녔습니다. 
지나가다가 돈 달라고 하는 사람을 그냥 지나친 적이 드물었습니다. 
군복무 시절 양지 바른 곳에 비스듬이 기대있는 힘없는 홈리스 아저씨를 
근무초소로 모셔다가 일회용 면도기로 더부룩한 수염을 말끔하게 깍아드렸 
습니다. 이런 일들이 한 두 가지가 아닙니다. 그리고 겉으로 애써 내색하지 
않았지만 속으로는 ‘아 나는 꽤 괜찮은 사람이다’라고 뿌듯해 했습니다. 

그러다가 교회생활을 하게 되면서 누구도 말해 주지 않았지만 그런 선 외에 
생명(조에)이란 것이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성경에 선악 지식의 나무 이외에 
생명나무가 있음을 알게 된 것은 그보다 훨씬 이후입니다. 

제가 이렇게 말씀드리면 어떤 분은 ‘그러면 어려운 사람 도와주고 병든 사람 
관심 갖는 것이 틀렸단 말이냐’, ‘그런 것들은 다 필요없고 오로지 생명만 
외쳐야 한다는 말이냐’ 라고 반문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 것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런 선행들이 많으면 많을 수록 좋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선행에 
도취하여 생명을 주의하지 못한다면 속임 당하는 것입니다. 또한 그런 선행은 
마가복음 4장이 말하는 생명의 씨앗과는 전혀 무관합니다. 

사실은 이러한 ‘천연적인 선과 생명의 차이점’에 대한 선명한 인식이 제 
인생에 큰 전환점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들으라 씨를 뿌리는 자가 뿌리러 나가서'(2절), 

‘뿌리는 자는 말씀을 뿌리는 것이라'(14절) 

하나님의 경륜은 하나님 말씀을 뿌리는 것입니다. 

이 말씀 안에만 생명이 있습니다. 이 생명의 말씀(요일1:1-2)이 자신과 
하나되고 자신의 입을 통해 흘러나가는 존재가 되는 시간 만이 참 가치가 
있는 삶입니다. 이것이 세월을 아끼는 것입니다. 만일 1983부터 지금까지 
20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여전히 고아원이나 찾아 다니고, 야학이나 하고, 
돈을 줒으면 한 푼도 안 쓰고 즉시 경찰서로 가져다 주고, 선행으로 신문에나 
나고, 눈이 오면 자기 집 앞 뿐 아니라 그 골목 전체를 쓸어주는 식의 삶을 살 
고 참 생명을 몰랐다면 전 인생을 낭비한 것입니다. 

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들은 씨뿌리는 자가 뿌린 씨를 받아 삼십, 육십, 
백배의 결실을 맺는 삶이어야 합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들은 우리 안에 
떨어진 씨가 싹이나고 이삭이 패고 곡식을 맺어 추수를 예비하는 시간들이어야 
합니다. 나타난 선도 이것과 관련이 있을 때에만 가치가 있습니다. 

2. 빛 

‘또 저희에게 이르시되 사람이 등불(뤼크노스,3088(들고다닐 수 있는 등))을 
가져오는 것은 (곡식되는) 말 아래나 침상아래 두겠느냐 등경 위에 두려함이 
아니냐'(막4:21) 

‘드러내려 하지 않고는 숨긴 것이 없고 나타내려 하지 않고는 
감추인 것이 없느니라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22-23절). 

한국사람이 한국말을 읽고도 무슨 말인지 금방 이해가 안되는 경우가 
바로 위와 같은 때일 것입니다. 

‘아니 당연한 말 아니요? 등불을 말이나 침상 아래 두는 사람이 어디잇어요 
없지. 그리고 등불은 당연히 등잔(lampstand)(뤼크니아, 3087)위에 두겠지요. 
그런데 그것이 어떻다는 말입니까? ‘ 위 대목을 그냥 표면적으로만 읽으면 이런 
반문이 나올 법 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처럼 평이한 말을 하신 다음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니’ 고 덧붙이셨습니다. 
도대체 ‘들을 귀'(막4:23, 9)라는 것이 무엇일까…. 

물론 문맥과 단어연구를 통해서 위 말씀에 대한 영적인 의미를 해석해 
내려면 못할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가장 기본적인 이해는 위 대목이 ‘빛’과 
관련된 말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빛 또는 등불은 과연 무엇 
일까요? 

일반적으로 말한다면 성경은 대체적으로 빛은 하나님과 그분의 왕국에 연관 
짓고 어둠은 사탄과 사탄의 왕국에 관련을 짓고 있습니다. 

일례로 요일1:5는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둠이 조금도 없으시니라’ 
고 말합니다. 골1:12는 ‘빛 가운데 성도의 기업이 있다’고 하고 13절은 
주님이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셨다고 말합니다. 롬13:12는 
‘밤이 깊고 낮이 가까왔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두움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라고 합니다. 그 다음 구절은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rioting)과 술 취하지 말며 음란과 호색하지 말며 쟁투(strife)와 
시기(envying)하지 말고 정욕을 위하여 육체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고 
경고합니다. 엡5:6은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었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고 말합니다. 요1:4-5는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빛이 어둠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이런 말씀들을 통해서 빛의 근원은 하나님 자신이요, 어두움의 근원 
은 사탄임을 유추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최소한 빛에 대해서 더 알기 원한다면 하나님께 나아가야 하고 어두움이 
싫으면 사탄에 속한 것들을 이길 수 있는 무엇인가를 추구해야 할 것입니다. 

저는 예전에 명문대학을 나오고 사회에서는 그처럼 박식하고 똑똑한 
사람들(국회의원, 기자, 교수, 평론가들…)이 왜 앞서 간 사람들이 
죽을 때 후회한 그 길을 대책없이 반복해서 따라가는지 잘 이해가 
안 된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알수 있습니다. 사람이 빛이신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추구하지 못하는 것은 그분들이 어두움 가운데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얻은 지식이나 지위나 지혜나 권세는 하늘(말씀)로부터 오는 빛과는 
아무 상관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어두움이 그분들 안에 여전히 존재 
하는 이유는 사회에서 어떤 성취를 얻을수록 마음이 높아지고 교만해지기 
쉽기 때문입니다. 사실 하나님 없는 성공은 그것이 바벨탑과 같아 사람보기엔 
대단한 것 같아도 하나님 앞에서는 한 줌의 흙에 불과합니다.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을 뿐입니다. 잠깐있다가 사라지는 안개와도 같습니다. 빛이 비취어 
자신들이 가진 것이 하나님보시기에 ‘Dung'(빌3:8)과 같음을 보는 사람에게 
복이 있습니다. 

원칙적으로 죽음을 통과한 후에도 남아 있을 수 없는 모든 것들은 다 
하나님 보시기에 배설물일 뿐입니다. 

반면에 성도들은 본질이 생명과 하나된 자들이요(빌2:15, 롬8:2, 10, 6, 11), 
교회 또한 그 본질이 금등대입니다(계1:20). 즉 생명과 빛은 죽음을 통과한 
후에도 여전히 존재합니다. 오히려 더 살아나고 더 강한 빛을 발합니다. 

이 사망의 그늘이 깊게 드리운 땅에서 하나님의 갈망을 이루고자 하는 
분마다 마땅히 생명과 빛되신 하나님과 깊고 견고한 연합을 유지해야 할 
것입니다. 그것만이 지속적으로 정체성을 유지하면서 사망과 어두움에 속한 
분들에게 강력한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비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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